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1)

조선의 찻사발을 품은 스위스 베른미술관

17세기 중엽 ‘도자기 선진국’ 조선에서 만든 명품 찻사발이 스위스 베른 시립미술관(Kunstmuseum Bern)에서 확인되었다. 베른시립미술관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에게 고용된 미술상이 구축한 컬렉션을 상속받으면서 따라온, 이 한국 유물을 확보한 것이다.

미술관은 2014년에 사망한 독일인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Cornelius Gurlitt, 1932~2014)가 소장하던 작품 1500여 점을 상속받았다. 이런 대규모 컬렉션에 대해 코르넬리우스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주장한다 .

그의 부친은 히틀러를 위해 미술품 약탈과 거래에 관계했던 독일의 유명한 화상(畫商)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런 연유로 코르넬리우스의 수장품은 나치 약탈품이니 원래 의 합법적 소유주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베른시립미술관이 웹사이트에 공개한 구를리트의 ‘잘츠부르크 리스트’에 따르면 작품 번호 0‘72_10_do.A’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도자기라는 것이 한국 전문가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 웹사이트에는 제작 국가를 모르는 듯 ‘아시아 도자기’라고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베른시립미술관과 공동으로 구를리트가 남긴 컬렉션을 조사한 ‘독일 분실 예술품 재단(German Lost Art Foundation)’의 설명은 약간 다르다.

재단은 보고서에서 해당 작품에 예술품 번호ID를 ‘532988’로 부여하면서 19세기 ‘교토 양식의 다완(茶碗)’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찻사발은 의문의 메모지와 함께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자택에서 발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던 독일 출신의 일본 미술 전문가 프리츠 룸프Fritz Rumpf, 1888~1949는 문제의 찻사발이 일본에서 왔거나 일본에서 제작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 듯 ‘일본 교토(?)’라고 물음표를 달아둔 개인 메모를 남겼다.

독일 분실 예술품 재단은 이 도자기에 대해서는 노란 동그라미를 붙여두었다. 노란 동그라미는 나치 집권 기간인1 933년부터 1945년까지 약탈인지, 합법적 거래로 확보한 것인지의 취득 경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재단은 구를리트 출처 조사는 말 그대로 작품의 기원과 출처 조사에 집중했을 뿐, 설명한 내용과 결론의 정확성과 신뢰성은 보장하지 않는다면서 보고서 결론은 바뀔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정보 제공을 환영한다고 덧붙여두고 있다.

단풍 무늬 도자기, 17세기 조선에서만 빚어

이 도자기는 독일 측의 설명대로 일본인이 만든 교토 양식일까? 사진을 살펴본 법기도자 이사장인 신한균 사기장은 문제의 찻사발에 대해 “실물을 직접 보지 않아 단언할 수 없지만, 임진왜란 직후 조선 도자기를 사모한 일본인들이 조선 도공에게 주문해서 만들어간 것이 확실한 것으로 추정된다”라며 “이런 주문 도자기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소장자가 고이 간직한 까닭으로 일본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라고 설명했다. 신 사기장은 “이런 명품 찻사발이 서양에서 발견됐다는 점은 함축하는 바가 많다”라고 평가했다.

매끈한 디자인에 색상이 화려한 요즘 도자기와 비교하면 베른미술관이 품은 도자기는 사진으로만 보면 고졸(古拙)하다. 이러한 찻사발은 17세기 중반까지 조선에서만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경남 양산 법기요에서 빚은 다완
(일본 교토 기타무라 미술관 소장)

신 사기장은 조선 전기의 조질백색도가 떨어지고 표면이 거칠다는 뜻 백자 계통의 도자기가 어떻게 머나먼 유럽까지 건너갔는지는 전문가와 학계가 나서서 규명하고 연구할 과제라고 말한다. 특히 베른미술관이 소장한 작품과 일본 교토에 있는 기타무라(北村)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은 형태뿐만 아니라 제작 방식 등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기타무라미술관이 소장한 찻사발은 17세기 중엽 경남 양산시 법기요에서 빚은 것으로, 만든 곳이 명확하다.

신 이사장은 “베른미술관이 공개한 찻사발은 옅은 황토색으로, 단풍처럼 꽃이 핀 모양(일명 모미지)과 유약을 바르지 않은 굽, 형태 등으로 볼때 우리 조상들이 부산 왜관요나 법기요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며 “찻사발 모미지는 점토에 핑크 카올린을 섞으면 생기는 것으로, 이런 모미지 찻사발은 전 세계에서 왜관요와 법기요에서 생산한 것뿐” 이라고 강조했다.

신 사기장은 이어서 “모미지는 17세기 중엽 일본에서 인기가 아주 높았지만, 제작할 수가 없어서 왜관요와 법기요에 이 같은 형태의 찻사발을 많이 주문해서 사 갔다”라고 덧붙였다.

우리 전문가들이 베른미술관 측에 이러한 도자기의 문화와 역사, 예술사적 의미와 가치를 설명해주고,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도록 설득해 제대로 대접받기를 기대해본다. 다른 나라 금고나 박물관 창고에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 유물을 찾아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게 하는 것 도문화재 회복만큼이나 의미가 깊다.

히틀러 예술품 수집상이 붙잡은 찻사발

조선에서 만든 도자기가 어떻게 스위스까지 갔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일본은 유럽과 왕래가 잦았다. 이런 연유로 당시 유럽 예술에는 일본 고유의 특징과 소재들이 반영되거나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 열풍’이 불었다. 이런 열풍에 힘입어 임진왜란 때 끌려가 일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삼평(李參平, ?~1655)을 뿌리로 하는 이마리(伊万里) 도자기를 무더기로 수출하던 일본인들은 가보寶로 간직했던 조선 도자기를 함께 팔았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외교사절로 왔다가 돌아간 당시 유럽 관리들이 구매나 선물 형태로 가져가면서 유럽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찻사발이 스위스 베른미술관에 넘어간 것은 아버지에게서 수많은 예술품을 상속받은 ‘아들’ 구를리트가 사망 직전인 2014년 5월 찻사발이 포함된 자신의 모든 컬렉션을 베른시립미술관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면서다. 이에 미술관은 무려 1500여 점을 횡재했다.

상속받은 작품의 상당수는 현대 미술을 개척한 칸딘스키, 피카소, 세잔, 마네 등 이름만으로 놀랄 만한 대가의 작품들이다. 독일 국적의 그가 다른 나라의 미술관을 유일한 상속자로 지정해 모든 예술품을 기증한 이유와 그의 부친이 어떻게 컬렉션을 구축했는지를 따라가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문화재와 예술품 약탈과 회복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1280호 30면, 2022년 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