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역탈 그리고 회복 (4)

유럽을 뒤집은 남자,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 ③

명작 확보에 혈안이 된 나치가 약탈한 작품이라고 모두 진품은 아니었다.

‘포옹한 연인들(Allegorical scene with embracing lovers)’이란 작품은 러시아 출신 프랑스 대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이 1920년대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졌다. 늦어도 1945년 이후에 힐데브란트가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 분실 예술품 재단에 따르면 샤갈

권위 기관인 샤갈위원회(Comit Chagall)가 2015년 문제의 작품을 조사한 결과 위작으로 결론을 내렸다.

샤갈 위작은 발견되는 즉시 폐기 처분되지만, 이 작품은 재단이 작가불명으로 분류해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이 그림의 소유자는 밝혀지지 않지만,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1941년 라트비아 수도이자 발트해와 접한 항구도시 리가에 살던 독일계 유대인 가문에서 약탈한 것으로 전해질 뿐이다.

구를리트 컬렉션, 나치 약탈에 편승

아들 코르넬리우스에게 예술품을 대규모로 물려준 힐데브란트 구를리트는 20세기 초중반 독일에서 활동한 미술사학자이자 미술관 관장, 미술품 거래상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현대 미술에 특히 관심이 많았고, 여러 화가와 친구가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친구가 된 화가들로부터 자신의 화랑에 전시할 작품을 사거나 전시된 작품을 일반인에게 판매했다. 힐데브란트는 나치가 집권한 1930년대 중반부터 히틀러가 세우려던 개인 미술관에 소장될 예술품을 수집하는 거래상으로 활동했다. 나치가 1937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자국의 미술관에서 빼앗아 모욕하는 퇴폐 예술 전시회와 1939년부터 강화된 ‘아리안화(Arisierung)’가 진행된 것과 맞물려 최고 권력자 히틀러의 비호 아래 힐데브란트는 당시 부유하지만 압박받는 유대인들이 소장한 예술품을 확보했다.

나치가 예술품을 소장한 부유한 유대인들을 꼬투리 잡아 구속하거나 사업체에 터무니없이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이들은 자신이 풀려나는 조건으로 또는 세금을 내려고 예술품들을 헐값에 처분해야 했다. 이런 나치 독일의 사회적・경제적 차별에 환멸을 느낀 일부 유대인은 독일을 떠나기 위해 자산 현금화를 시도했다. 힐데브란트는 이런 개인들에게서 아주 낮은 가격에 예술품을 사들여 되팔기도 했다.

홀로코스트와 인권 전문가인 마이클 베이질러Michael Bazyler 미국 채프먼대학 국제법 교수는 저서 『홀로코스트의 정의, 미국 법정에서의 회복 투쟁』에서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에게서 약탈한 재산이 2005년 기준으로 2300억 달러에서 3200억 달러에 이른다”라며 역사상 최악의 강탈이라고 표현한다.

한편으론 이런 예술품 거래를 성사할 화상이 거의 없었기에 힐데브란트는 궁지에 처한 예술품 소유자들을 도왔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도 자신이 이런 과정을 거쳐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종전 후 힐데브란트는 나치 시대 감금과 강요 등으로 팔린 작품을 보상하라거나 물려달라는 청구인들에게 그 어떤 협조도 하지 않았다.

나치가 퇴폐로 낙인찍은 예술도 사들여 컬렉션을 꾸리다

당시 나치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많은 현대 독일 예술품에 대해 히틀러의 시각에서 예술로 볼 수 없는 작품들을 ‘퇴폐’로 분류하고, 독일 전역의 미술관에서 압수했다. 퇴폐 예술은 독일인 감정을 모독하고, 자연형을 파괴하거나 혼란스럽게 하고, 예술적 기량 부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나치는 정의하고 있다. 당연히 표현주의, 추상주의를 이끈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이표적이 되었다.

나치는 이른바 퇴폐의 본질을 보여준다며 1937년에 압수품 일부를 전시하는 순회 ‘퇴폐 예술 전시회(Ausstellung Entartete Kunst)’를 가졌다. 그 당시 정부는 몰수한 퇴폐 미술품을 되도록 외국에 많이 팔아 정부 재원으로 마련하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유럽 여러 나라를 침공하면서 나치 특수 부대는 금, 은, 화폐, 그림, 도자기, 서적, 중요문화재와 종교적 유물 등을 마구 훔쳐 갔다.

당시 이런 약탈품 거래에 구를리트를 포함한 카를 부흐홀츠, 페르디난트 묄러, 베른하르트 뵈흐메르 등 네 명이 나치의 승인을 받아 해외에서도 활동한 판매 에이전트였다. 작품 판매에 실패하면 대부분 경우 그렇듯, 이들은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낮은 가격에 사들여 개인 소장품으로 추가했다.

프랑스가 함락되면서 나치는 힐데브란트를 포함한 이 대리인들에게 프랑스 예술 자산, 특히 미술관과 부유한 수집가들로부터 약탈을 통한 작품 확보를 승인해주었다. 이 가운데 히틀러가 세우려던 개인 미술관을 위해, 일부는 나치 2인자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1893~1946)의 개인 컬렉션으로 들어갔다.

히틀러를 대리하여 1943~1944년 ‘작품 쇼핑’ 여행을 떠났던 힐데브란트는 파리와 네덜란드에서 히틀러를 위해 168점을 사들였다. 힐데브란트가 자신의 컬렉션을 위해 산 작품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아 얼마나 많은 작품을 구매했는지는 추정할 수 없다.

힐데브란트는 파리 예술품 구매 여행에서 자신의 소장품이 더욱 풍부해졌고, 당시 히틀러 정권에서 지급한 엄청난 예술품 구매 수수료를 챙겨 큰 부자가 되었다.

힐데브란트는 나치에게서 박해받는 예술가들로부터 개인 목적으로 그림을 사들였다. 나치에게 퇴폐 예술가로 낙인찍혀 쫓겨 네덜란드에 살던 독일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1884~1950)에게 힐데브란트는 히틀러 개인 미술관을 위해 1944년 9월 ‘바, 브라운(Bar, Brown’) 등 다섯 점을 사들였고, 이가운데 ‘바 브라운’을 빼돌려 챙겼다.

힐데브란트 사후, 이 작품을 힐데브란트의 아내가 경매에 내놓았으나 팔리지 않았고, 아들 코르넬리우스가 1972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경매에 부쳐 수수료를 제외한 9만 마르크를 받았다. 이 작품은 나중에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20만 파운드에 팔렸다. 베크만의 가족들은 힐데브란트가 샀던 작품은, 당시 화가는 상당히 제한된 환경에 놓여 있었지만 합법적 거래였다며 판매 대금 환수를 주장하지 않았다.

문화재 전쟁 – 전쟁과 역탈 그리고 회복 (4)

유럽을 뒤집은 남자,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 ③

명작 확보에 혈안이 된 나치가 약탈한 작품이라고 모두 진품은 아니었다.

‘포옹한 연인들(Allegorical scene with embracing lovers)’이란 작품은 러시아 출신 프랑스 대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이 1920년대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졌다. 늦어도 1945년 이후에 힐데브란트가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 분실 예술품 재단에 따르면 샤갈

권위 기관인 샤갈위원회(Comit Chagall)가 2015년 문제의 작품을 조사한 결과 위작으로 결론을 내렸다.

샤갈 위작은 발견되는 즉시 폐기 처분되지만, 이 작품은 재단이 작가불명으로 분류해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이 그림의 소유자는 밝혀지지 않지만,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1941년 라트비아 수도이자 발트해와 접한 항구도시 리가에 살던 독일계 유대인 가문에서 약탈한 것으로 전해질 뿐이다.

구를리트 컬렉션, 나치 약탈에 편승

아들 코르넬리우스에게 예술품을 대규모로 물려준 힐데브란트 구를리트는 20세기 초중반 독일에서 활동한 미술사학자이자 미술관 관장, 미술품 거래상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현대 미술에 특히 관심이 많았고, 여러 화가와 친구가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친구가 된 화가들로부터 자신의 화랑에 전시할 작품을 사거나 전시된 작품을 일반인에게 판매했다. 힐데브란트는 나치가 집권한 1930년대 중반부터 히틀러가 세우려던 개인 미술관에 소장될 예술품을 수집하는 거래상으로 활동했다. 나치가 1937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자국의 미술관에서 빼앗아 모욕하는 퇴폐 예술 전시회와 1939년부터 강화된 ‘아리안화(Arisierung)’가 진행된 것과 맞물려 최고 권력자 히틀러의 비호 아래 힐데브란트는 당시 부유하지만 압박받는 유대인들이 소장한 예술품을 확보했다.

나치가 예술품을 소장한 부유한 유대인들을 꼬투리 잡아 구속하거나 사업체에 터무니없이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이들은 자신이 풀려나는 조건으로 또는 세금을 내려고 예술품들을 헐값에 처분해야 했다. 이런 나치 독일의 사회적・경제적 차별에 환멸을 느낀 일부 유대인은 독일을 떠나기 위해 자산 현금화를 시도했다. 힐데브란트는 이런 개인들에게서 아주 낮은 가격에 예술품을 사들여 되팔기도 했다.

홀로코스트와 인권 전문가인 마이클 베이질러Michael Bazyler 미국 채프먼대학 국제법 교수는 저서 『홀로코스트의 정의, 미국 법정에서의 회복 투쟁』에서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에게서 약탈한 재산이 2005년 기준으로 2300억 달러에서 3200억 달러에 이른다”라며 역사상 최악의 강탈이라고 표현한다.

한편으론 이런 예술품 거래를 성사할 화상이 거의 없었기에 힐데브란트는 궁지에 처한 예술품 소유자들을 도왔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도 자신이 이런 과정을 거쳐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종전 후 힐데브란트는 나치 시대 감금과 강요 등으로 팔린 작품을 보상하라거나 물려달라는 청구인들에게 그 어떤 협조도 하지 않았다.

나치가 퇴폐로 낙인찍은 예술도 사들여 컬렉션을 꾸리다

당시 나치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많은 현대 독일 예술품에 대해 히틀러의 시각에서 예술로 볼 수 없는 작품들을 ‘퇴폐’로 분류하고, 독일 전역의 미술관에서 압수했다. 퇴폐 예술은 독일인 감정을 모독하고, 자연형을 파괴하거나 혼란스럽게 하고, 예술적 기량 부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나치는 정의하고 있다. 당연히 표현주의, 추상주의를 이끈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이표적이 되었다.

나치는 이른바 퇴폐의 본질을 보여준다며 1937년에 압수품 일부를 전시하는 순회 ‘퇴폐

예술 전시회(Ausstellung Entartete Kunst)’를 가졌다. 그 당시 정부는 몰수한 퇴폐 미술품을 되도록 외국에 많이 팔아 정부 재원으로 마련하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유럽 여러 나라를 침공하면서 나치 특수 부대는 금, 은, 화폐, 그림, 도자기, 서적, 중요문화재와 종교적 유물 등을 마구 훔쳐 갔다.

당시 이런 약탈품 거래에 구를리트를 포함한 카를 부흐홀츠, 페르디난트 묄러, 베른하르트 뵈흐메르 등 네 명이 나치의 승인을 받아 해외에서도 활동한 판매 에이전트였다. 작품 판매에 실패하면 대부분 경우 그렇듯, 이들은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낮은 가격에 사들여 개인 소장품으로 추가했다.

프랑스가 함락되면서 나치는 힐데브란트를 포함한 이 대리인들에게 프랑스 예술 자산, 특히 미술관과 부유한 수집가들로부터 약탈을 통한 작품 확보를 승인해주었다. 이 가운데 히틀러가 세우려던 개인 미술관을 위해, 일부는 나치 2인자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1893~1946)의 개인 컬렉션으로 들어갔다.

히틀러를 대리하여 1943~1944년 ‘작품 쇼핑’ 여행을 떠났던 힐데브란트는 파리와 네덜란드에서 히틀러를 위해 168점을 사들였다. 힐데브란트가 자신의 컬렉션을 위해 산 작품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아 얼마나 많은 작품을 구매했는지는 추정할 수 없다.

힐데브란트는 파리 예술품 구매 여행에서 자신의 소장품이 더욱 풍부해졌고, 당시 히틀러 정권에서 지급한 엄청난 예술품 구매 수수료를 챙겨 큰 부자가 되었다.

힐데브란트는 나치에게서 박해받는 예술가들로부터 개인 목적으로 그림을 사들였다. 나치에게 퇴폐 예술가로 낙인찍혀 쫓겨 네덜란드에 살던 독일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1884~1950)에게 힐데브란트는 히틀러 개인 미술관을 위해 1944년 9월 ‘바, 브라운(Bar, Brown’) 등 다섯 점을 사들였고, 이가운데 ‘바 브라운’을 빼돌려 챙겼다.

힐데브란트 사후, 이 작품을 힐데브란트의 아내가 경매에 내놓았으나 팔리지 않았고, 아들 코르넬리우스가 1972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경매에 부쳐 수수료를 제외한 9만 마르크를 받았다. 이 작품은 나중에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20만 파운드에 팔렸다. 베크만의 가족들은 힐데브란트가 샀던 작품은, 당시 화가는 상당히 제한된 환경에 놓여 있었지만 합법적 거래였다며 판매 대금 환수를 주장하지 않았다.

1283호 30면, 2022년 9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