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역탈 그리고 회복 (5)

눈 뜨고 못 볼 히틀러의 ‘퇴폐 예술’ 광기 ➀

■ 미술계는 알지만, 대중 기억에서 사라진 구를리트

힐데브란트는 1945년 6월 아내와 함께 연합군에 체포될 당시 예술품 20상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조사받을 때 힐데브란트 부부는 미군 당국에 1945년 2월 드레스덴 대공습 화재로 자택에서 보관 중이던 예술품과 거래 내역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다고 진술했다. 미국과 독일 당국이 작품 150점을 압수했으나 그가 합법적으로 샀다고 주장하자 되돌려주었다.

특히 힐데브란트는 자신의 할머니가 유대계이기 때문에 자신도 나치박해의 피해자라고 포장하는 데 성공하면서 소유물 대부분을 돌려받았다. 힐데브란트의 주장대로 드레스덴 대공습 화재로 미술품과 거래명세서가 사라졌는지에 관계없이 많은 작품을 숨겨두는 데 성공했다.

1947년 힐데브란트는 예술품 거래를 재개했고, 1956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도 1964년에 사망하면서 작품 대다수는 아들 코르넬리우스에게 넘어갔고, 일부는 딸에게 상속되었다.

독일 미술상들은 가끔 힐데브란트와 거래하면서 그의 소장품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자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의 컬렉션은 은둔 생활을 하는 아들 코르넬리우스와 함께 40년 이상 살아남았다.

부모의 사후, 특별한 직업도 없이 살던 코르넬리우스는 작품 몇 점을 팔아 생활해왔다. 특히 1988년과 1990년에 팔아치운 그림 값을 스위스 은행에 예치해두고 4주에서 6주 단

위로 방문해 현금으로 찾아 돌아오곤 했다. 베크만의 작품인 ‘사자 조련사(The Lion Tamer)’는 컬렉션 압수 3개월 전인 2011년 경매에서 마지막으로 팔아 대부분 의료비로 사용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팔았던 ‘사자 조련사’에 대해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로 자처하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유명 예술품 거래상인 알프레트 플레흐트하임(Alfred Flechtheim, 1878~1937) 후손들이 반환을 주장하고 나서는 등,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75년이 넘었지만 반환 문제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눈 뜨고 못 볼 히틀러의 퇴폐 예술광기

1939년 3월 20일 베를린 소방서 광장, 힐데브란트 구를리트를 비롯한 히틀러 화상들은 나치가 ‘퇴폐 예술’로 지정해 압수한 회화와 조각, 스케치와 판화 등 작품 5000여 점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누구의 작품이 불탔는지는 아쉽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꼼꼼하게 기록하는 독일에도 작품을 소각하는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실제로 퇴폐 예술 화형(火刑)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치가 저지른 퇴폐 예술에 대한 평가나 반(反)나치적인 도서를 대규모로 불살랐던 전력에 비춰보면 예술품 소각도 사진이나 공식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독일의 소리DW>, 2014년 3월 20일자 기사).

이보다 6년 앞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933년 5월 10일 저녁, 베를린 오페라 광장(오늘날 베벨 광장)에서 파울 괴벨스(Paul Joseph Goebbles, 1897~1945)가 “유대인의 지적 과장 시대는 끝났다”라는 일장 연설을 마치자 나치학생들이 광장에 쌓아둔 책 2만 5000여 권에 불을 붙였다. 비에 젖은 책에 불이 잘 붙지 않자 소방서에서 휘발유를 끼얹었다. 현재 베벨 광장에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가 1821년에 쓴 희곡 「알만조르Almansor」에 “책을 불태우면, 결국 인간도 불태울 것이다(Dort, wo man Bücher verbrennt, verbrennt man am Ende auch Menschen)”라는 글귀가 있다. 나치가 책을 불태우기 110여 년 전에 이런 경고를 날렸던 하이네의 책도 물론 소각 대상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전조를 보여준 분서(焚書)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후 수 주간 독일 대학촌 34곳에서 수십만 권이 재로 변했다. 이처럼 ‘이념정화’ 전쟁을 벌인 나치가 비록 책은 불태워 없앨 수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사상은 나치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살아남아 있다.

예술품도 소각 관심 끌어 팔려는 의도

도서 소각만큼이나 악명 높은 나치의 예술품 소각 소식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예술품 소각은 힐데브란트와 함께 활동한 나치 하수인 거래상 부흐홀츠, 뮐러, 뵈흐메르가 ‘퇴폐’라는 딱지가 붙은 압수 작품이 팔리지 않자 이를 팔아치우고자 세계의 이목을 끌려는 계획된 행동이었다 .

당장 스위스 바젤미술관(Kunstmuseum Basel)이 5만 스위스 프랑을 들고 달려왔다. 명화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충격에 예술 애호가들도 사러 왔다 (<BBC>, 2013년 11월 4일자 기사).

이러한 판매로 힐데브란트와 이 화상들은 베를린 외곽 니데르숀하우센에 가게를 열고 1937~1938년 독일 미술관 벽에서 떼어낸 그림과 조각 약 1만 6000점을 팔아 치웠다.

세계 최초의 공공 미술관인 바젤미술관은 박해받던 유대계 독일인 미술사학자이자 예술품 수집가 커트 글레이저Curt Glaser, 1879~1943)가 소장한 뭉크, 마티스와 샤갈 등의 작품 100점 이상을 ‘공정한 시장 가격’에 사들였다고 주장한다.

글레이저는 나치의 아리안화 정책으로 베를린 미술도서관장 자리와 관사에서 쫓겨나면서 독일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이에 예술품을 비롯한 모든 것을 1933년 5월 베를린에서 열린 경매 등에서 두 차례에 걸쳐 처분한 뒤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달아났다. 글레이저는 경매로 예술품을 팔아 돈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바젤미술관은 애초 나치 박해를 받은 글레이저 소장품이었는지 몰랐다는 주장과는 달리 이 작품들이 경매 당시 그의 소장품인 것을 알았고, 매우 저렴하게 구매한 것으로 2017년에 이르러 밝혀졌다.

결국 곤혹스러워하던 미술관은 2020년 3월에 입장을 바꾸었다. 미술관은 회복의 한 방법으로 글레이저 후손들에게 작품 값을 지급하면서 2022년까지 그의 컬렉션을 전시하기로 합의했다. 합의 금액은 비밀로 유지하고 있다.

1284호 30면, 2022년 9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