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6)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약탈당한 나라가 어디 한국뿐이랴. 중국과 대만을 비롯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그렇다. 아프리카와 아시아권의 약탈 문화재 반환에 대해 이젠 식민제국주의를 거쳤던 국가들이 답할 차례이지만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그냥 돌려주지 않는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창조자들이 만든,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눈 뜨고 못 볼 히틀러의 ‘퇴폐 예술’ 광기 ②

■ 스위스, 전쟁 기간 중 약탈 예술품 이동 통로

1939년 6월 30일 스위스 루체른의 그랜드호텔 내셔널. 스위스의 유명한 경매사 테오도르 피셔(Theodor Fischer, 1878~1957)가 피카소, 고갱, 프란츠 마르크 등의 작품 126점을 경매에 부쳤다.

나치가 퇴폐라고 경멸한 작품들이었으나 유명한 예술 거래상과 ‘큰 손’ 컬렉터, 미술관 대리인이 참가했다. 물론 호기심에 구경삼아 참여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다수는 경매에 나서면 나치 정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추어질까 우려해 경매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피셔는 작품의 최소 가격을 올려 부르면서 경매를 진행했다. 그의 경매는 프랑스 미술잡지 <보자르Beaux Arts>에 1939년 7월 7일자로 보도되었고, 기사는 작품에 대한 피셔의 경멸적인 태도를 주목했다. 예컨대 독일 표현주의 화가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 1881~1955)의 ‘파이프를 든 남자(Man with a Pipe)’에 대해 “화가의 자화상이 틀림없다. 누구도 이런 종류의 작품을 원하지 않는다”라며 경매 철회를 선언했다. 현재는 분실 예술품으로 신고된 상태다.

피셔는 또 다른 작품에 대해서 “이 여성(작품의 인물)은 대중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다”라는 이유로 경매를 취소하는 등 28점이 낙찰되지 않았다.

경매품은 나치의 예술품 약탈 부대가 압수한 것으로, 괴링이 피셔에게 팔아달라고 넘긴 작품도 많았다. 전쟁 기간에 독일 전역과 프랑스 파리 등의 미술 시장이 문을 닫으면서 스위스가 최대의 미술품 거래 시장이 되었고, 이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인물이 피셔였다.

피셔는 전후 미국 대외전략정보국(OSS)의 약탈예술품정보대(ALIU)에서 작성한 예술품 약탈과 거래에 관련된 인물들과 이들의 활동 내역을 기술한 ‘적기 명단 리스트’에 올라 있다. 미국 OSS는 그를 “스위스에서 활동한 약탈 예술품 거래의 핵심이자 현재까지 발견된 약탈 예술품의 최대 수령자”라고 기술하고 있다.

나치 약탈 문화 예술품을 회복하는 국제적인 민간 조직인 ‘예술품 복원 위원회(Commission for Art Recovery)’는 히틀러의 부상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스위스를 “자산을 빨아들이는 자석”으로 서술했다. 나치 집권 시기와 전쟁 직후, 스위스는 예술품과 문화재 거래의 중심지이자 이동 통로였다. 매각은 공개적이었지만 아무도 정상적인 미술품 경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공개 경매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화상들에 의해 비공개로 판매된 많은 작품의 향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 나치 퇴폐 이론, 문화 통제와 대중의 지지를 굳히는 ‘괴물’

나치가 주장하는 퇴폐 예술을 살펴보자.

히틀러는 1933년 1월 총리로 집권하자 국가에 자신이 생각하는 미적 이상을 따르도록 강제했다. 나치가 선호하는 미술은 1800년대 이전에 유럽에서 활동했던 대가 ‘올드 마스터(Old Master)’가 그린 고전적인 초상화와 풍경화였다. 또 그리스와 로마 작품은 유대인에 의해 오염되기 이전 시대로, 내면의 인종적 이상을 외부로 구체화한 것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현대 예술은 타락한 20세기 사회를 반영한다며 이런 작품은 퇴폐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현대 예술은 독일 정신에 대해 유대인이 가한 ‘미적 폭력’ 행위라고 생각했다. 또 독일 예술이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라고 진단하면서 바우하우스와 입체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야수파, 인상파와 신인상파, 신즉물주의, 초현실주의를 비난했다. 현대 독일 예술에 크게 기여한 샤갈, 리베르만, 마이드너 등도 퇴폐 예술가에 포함되었다.

1930년대 당시로서는 사상 최악의 비극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예술가들이 새롭게 바라본 인간과 사물,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의 구조적 갈등과 인간 내면의 감정 분열 그리고 그 표현 양식을 전부 부정했다.

나치는 퇴폐 이론을 주창하면서 문화를 통제하고 대중의 지지를 굳히는 한편, 반(反)유대주의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이런 퇴폐 문화를 정화한다며 수많은 미술가와 음악가, 큐레이터를 내쫓고 그 자리에 나치 당원들로 채웠다.

히틀러가 집권한 그해 9월, 히틀러 정권의 대중예술선전상 괴벨스를 수장으로 하는 제국문화원(Reichskulturkammer)을 설치했다. 제국문화원 아래에는 음악, 영화, 문학, 건축, 시각 예술 등의 개별 부문의 문화원을 두고, 개별 문화원은 나치의 시각에서 ‘순수한’ 예술가들로 채웠다. 나치가 원하지 않거나 해로운 요소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등 배제되었다.

1935년 기준으로 제국문화원에 등록된 예술가 회원은 10만 명에 이르렀다. 나치는 예술가들을 배제와 감시 및 통제 대상인 ‘블랙 리스트’, 보호와 지원 및 권장 대상인 ‘화이트 리스트’로 나누어 관리했다.

제국문화원은 1937년 7월 19일부터 11월 30일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 11개 도시에서 ‘퇴폐 예술 전시회(Die Ausstellung Entartete Kunst)’를 개최하였다.

1285호 30면, 2022년 10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