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9)

나치 약탈 부대 ERR ①

“총통미술관을 채워라”, 나치 약탈 부대 ERR

■ 유대 문제 연구에서 출발한 ERR, 약탈 부대로

유럽을 몸서리치게 한 나치의 문화 예술품 약탈 부대 ‘로젠베르크 제국사령부(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 ERR)’는 당 이론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의 이름을 따 설치한 것으로, 애초에는 제국 지도부가 표적으로 삼은 유대인의 생활, 특히 이들의 문화를 ‘연구’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이 연구의 이면에는 로젠베르크가 독일 민족의 우수성과 세계 정복의 야망을 드러내고, 나치 이념에 반대되는 문화를 찾아내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고자 로젠베르크는 동료인 반(反)유대 성향의 학자와 전문가들에게 반유대 연구를 후원하면서 유대인과 관련된 기록물과 도서를 수집하라고 제안했다.

이런 가운데 히틀러 친위대인 슈츠슈타펠Schutzstaffel, SS이 1940년 6월부터 고가 미술품의 노다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유대인 소유의 방대한 예술품, 책과 문헌 자료, 수기 원고, 귀중품, 교회의 중요 공예품을 약탈하자 ERR도 가담해 훔쳐내기 시작했다.

한 달 뒤인 7월 ERR는 히틀러 명령으로 약탈 권한을 부여받으면서 점령지에서 활동하는 공식 예술품 조달 조직이 되었다. 즉, 예술품 약탈과 절도가 ERR의 주요 임무로 변질된 것이다.

국립도서관과 기록보관소와 같은 문서고를 비롯해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 화랑, 종교 시설, 프리메이슨 집회소, 나치 침략으로 나라를 떠나버린 제3제국의 적들, 비유대인 개인 컬렉션도 약탈 표적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유대문제연구소와 같은 도서관들도 약탈되었다.

ERR는 약탈을 용이하게 하고자 점령지를 여덟 지역으로 나누고 음악, 시각예술, 역사, 도서관, 교회 등 5개 실무분야로 구분했다. ERR의 직접적인 약탈 대상은 나치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의 소유물이었다. ERR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1940년 11월에서 1944년 7월까지 파리의 개인 컬렉션 203곳에서 2만 1903점을 강탈했다. 1941년 4월부터 1944년 7월까지 ERR가 파리에서 독일의 약탈품 주요 보관소인 남부 바이에른주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으로 운반한 약탈품 분량이 화물열차로 1418칸에 이른다.

이와는 별도로 선박으로 42만 7000톤을 실어 날랐다. ERR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폴란드, 그리스, 이탈리아, 소련과 발트해 연안 국가들에서도 활동했다. 요원들은 군복을 입었고, 어깨에는 계급장도 달려 있었다. ERR는 1945년 5월 나치의 항복과 함께 해체되었다.

■ 히틀러가 가장 눈독 들인 로스차일드 컬렉션

서방 국가들 가운데 프랑스가 가장 심하게 약탈되었다. 예술품이 풍부한 데다 프랑스에 사는 유대인들은 당시 최고이자 최상의 예술품 거래상이자 수집가였기 때문이다. 종전 후 프랑스 공식 집계 결과, 개인 소장품의 3분의 1을 나치에 빼앗긴 것으로 추정한다. 전쟁 기간에 파리는 세계 최대이자 가장 중요한 예술품 거래시장으로 부유한 프랑스인뿐 아니

라 유럽인과 미국 수집가들이 와서 거장의 작품과 현대 미술을 구매해갔다.

특히 독일,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에도 금융 왕가를 이룬 ‘로스차일드(Rothschild) 컬렉션’은 나치 히틀러가 가장 부러워했던 표적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거장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천문학자(The Astronomer)’ 등 북유럽 거장들의 몇몇 대작을 히틀러는 전쟁도 시작하기 전에 손에 넣어야 할 ‘위시 리스트(wish list)’에 올려 두었다.

프랑스를 점령하자마자 나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파리 저택에 들이닥쳐 재산을 압수했다. 나치는 약탈 예술품에 대해 카탈로그를 정확히 만드는 데 병적일 정도로 집착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나온 작품은 5003점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명작으로 ‘천문학자’, 렘브란트의 1636년 작품 ‘표준적인 소위(The Standard Bearer)’,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1?~1666)의 ‘이사벨 코이만의 초상화(Portrait of Isabel Coymans)’,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Portrait of Madame de Pompadour)’ 등이었다.

■ 약탈품 상자에 히틀러의 H, 괴링의 G로 표시

프랑스에서 약탈한 예술품은 히틀러와 괴링이 나누어 가졌다. 괴링은 예술품 횡재에 너무 기뻐서 ERR 요원들에게 가장 좋은 작품들을 골라 개인 전시회를 열도록 명령했고, 며칠 뒤 파리를 방문해 약탈품이 보관된 주드폼(Jeu de Paume) 미술관에 들러 그림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특별 컬렉션은 히틀러가 먼저 선택한 뒤의 나머지라는 것을 알았다.

예술품 수집에 집착한 나치는 1941년 11월부터 히틀러의 것과 괴링의 것을 분리해서 담았다. 예상대로 히틀러가 가장 좋은 것, 즉 ‘사자의 몫’을 차지했다. 히틀러를 위해 담은 예술품 상자에는 H 마크와 함께 1번부터 19번까지 번호가 찍혀 있었다. 괴링의 예술품 상자에는 G 마크와 함께 1~23번까지 번호가 붙었다. H 5번 상자에는 영국 화가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가 그린 초상화들이, H 6번 상자에는 프란스 할스의 작품과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초상화 두 점이 들어 있었다. 컬렉션에서 전쟁 시작 전부터 히틀러가 눈독을 들였던 페르메이르의 ‘천문학자’는 H 13번 상자에 담겨 운반되었다.

ERR 수장 로젠베르크가 이와 관련해 히틀러 비서 마르틴 보르만에게 짧지만 만족스럽다는 메모를 보냈다.

“서두르면 예술품 압수에 관한 보고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그(히틀러)가 기뻐할 것으로 믿으며, 그가 말한 델프트(Delft)의 그림이 로스차일드에서 압수한 예술품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총통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1288호 30면, 2022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