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18)

“보이는 대로 가져와라,” 소련의 ‘트로피 여단’ 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나치에 기습당한 소련, “국민 불안, 미술품 대피 안 돼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군이 소련 국경선을 기습적으로 넘었다. 갑작스러운 침공은 평범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 국민뿐 아니라 국가지도자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최악의 독재자인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은 나치 독일과 맺은 독소불가침조약과 히틀러를 믿었고, “조만간 공격이 있을 것 같다”라는 수많은 경고를 무시했다. 전쟁 첫날 새벽 4시, 독일 공군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를 공습했다. 이어 나치 탱크가 줄지어 소련 영토로 점점 더 깊이 쳐들어왔다. 전쟁 발발 첫 며칠 동안 소련군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나치의 기습 공격에 소련은 놀랐고, 혼란스러워 미술관 컬렉션 대피는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때때로 대피시키기는 했지만,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나치군이 키예프의 문턱에 들어섰을 때 지방 관료들은 미술관과 박물관 직원들에게 금속으로 만든 것을 먼저 대피시키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미적 가치나 중요성이 거의 없는 19세기 청동 촛대들은 대피했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했다.

또 컬렉션을 대대적으로 대피시키지 않은 것은 소련 공산당 관료와 군부의 강압적인 조치에 따른 것으로, 국민에게 전쟁 상황이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미술품 대피를 금지했다.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인 당시 레닌그라드 외곽 핀란드만의 휴양 도시 페테르고프(Petergof) 컬렉션은 나무 상자에 포장되어 이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신 내무인민위원회(NKVD) 장교들이 미술관 직원들을 향해 ‘패배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용맹한 볼셰비키 적군(赤軍, 소련 정규군)이 적에게 항복하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책했다. 이에 대피가 중단된 수많은 미술관 컬렉션은 나치가 점령한 영토에 그대로 남았다.

레닌그라드는 제정 러시아 시절에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불리다가 소련을 세운 레닌이 사망하자 그를 기려 1924년부터 도시 이름을 레닌그라드(Leningrad)로 바꾸었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인 19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Peterburg)로 다시 변경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수도가 모스크바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문화 수도’로 불린다.

또한 페테르고프는 오늘날 페트로드보레츠(Petrodvorets)로 불린다. 핀란드만에 접한 이곳에 표트르대제가 1715년부터 궁전을 짓기 시작하면서 왕족과 귀족의 궁전과 별장 수십 동이 들어서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크게 파괴되었다.

반면, 나치는 전쟁 첫날부터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린츠에 세우려는 총통미술관을 장식하기 위해 소련 미술관을 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41년 여름부터 히틀러가 신뢰하는 총통미술관의 컬렉션 수집 책임자인 한스 포제는 레닌그라드 컬렉션 전문가인 폰 홀스트를 택해 소련 미술관들의 소장품을 선별해 가져갔다.

그해 10월, 나치 약탈 부대 로젠베르크 제국사령부(ERR) 수장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폰 홀스트를 자신의 휘하에 두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당시 소련에서 약탈한 문화예술품을 베를린으로 이동하는 책임을 맡은 ERR가 약탈과 운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슬라브 문화를 파괴한 나치, 커튼도 바닥도 떼어가

레닌그라드는 점령당하지 않았지만, 그 외곽에 있던 유명 황제의 별궁들은 나치에게 점령되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1729~1796)의 궁전 컬렉션은 모두 강탈되었다. 나치는 벽에 붙어 있는 목제 장식과 중국산 비단 커튼도 떼어내 가져갔다. 정교하게 장식된 마룻바닥도 해체해서 들고 갔다. 알렉산드르 1세의 궁전은 오래된 가구와 프랑스어로 된 서적 7000~8000권, 러시아어로 적힌 원고와 서적 5000권이 강탈되었다.

약탈되지 않은 문화재와 예술품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었다.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빠진 나치는 슬라브Slavs 문화를 증오했고, 더욱 잔학하게 대했다. 슬라브 민족은 원시적이며, 제3제국을 위해 고된 노동에나 적합하다고 여겼다. 슬라브 문화를 열등하다고 믿었던 나치는 이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면서 거의 보존하지 않았다. 소련을 침략한 나치 독일은 러시아 정교회에 불을 지르고, 박물관과 미술관4 27곳, 도서관 약 4000곳을 약탈하고 1억 1000만 권의 도서를 불태웠다. 약탈한 작품들은 히틀러가 계획했던 총통미술관의 벽을 장식할 예정이었다.

게르만적이지는 않지만 ‘열등한’ 슬라브 문화에도 너무나 좋은 것들이 많았다. 예컨대 모스크바에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 클린의 차이콥스키 박물관과 그 소장품은 모두 우수했지만 너무나 슬라브적이어서 나치에게는 보존할 가치가 없었다. 박물관 컬렉션은 약탈당하거나 불태워졌고, 건물은 군용 차량 정비소로 사용되었다.

러시아 황제들의 피서지로 별궁들이 모여 있는 ‘황제의 도시’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의 예배당은 차고로 바뀌었고, 예카테리나 2세가 아들 파벨 1세에게 선물한 러시아 고전주의 건축의 걸작인 파블롭스크는 마구간으로 쓰였다. 1944년 소련군이 되찾았을 때 대궁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예카테리나 궁전에 있는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호박방의 내부 장식물이 나치에게 약탈당했다고 러시아는 여전히 믿고 있다.

이런 상실된 컬렉션 대다수는 온전하게 카탈로그로 복원할 수 없다. 긴급했던 당시 도난 물건을 책으로 엮거나 통계를 낼 수 없어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성상과 그림, 공예품 등이 부지기수로 약탈당하면서 사회주의 종주국이라는 국가적 자부심이 여지없이 훼손되었다.

1297호 30면, 2023년 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