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19)

“보이는 대로 가져와라,” 소련의 ‘트로피 여단’ ➁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 소련도 약탈 부대 운영 ⋯약탈 목록 작성도

1942년 11월 2일 소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령으로 인민위원회 산하에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 및 공범이 저지른 범죄 확인과 조사를 위한 국가 특별위원회(ChGK)’가 설치되었다. 전쟁 기간 소련이 입은 피해를 평가하고,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피해를 보상받기 위한 것이 설립목적이었다.

국가 기구인 특별위원회 자체 자료에 따르면 이 위원회에 참가한 정규 조직원은 3만 2000여 명이었고, 한창 시절에는 민간인 700만 명이 자료와 증거 수집에 참여했다. 위원회가 낸 보고서 27건은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과 일본 전범 재판에서 소련 측의 기소 증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보고서는 1943년 6월 28일 처음 발간되었고, 1945년 9월 18일 발간이 마지막이었다.

특별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나치와 전쟁을 치르는 4년 동안 사라졌거나 파괴 또는 훼손된 미술관 물품은 56만 4723점에 이른다. 전쟁이 막바지로 향하자 특별위원회는 소련 전문가들에게 약탈당한 회화, 조각, 공예품 목록 작성과 함께 등가等價의 독일 컬렉션 목록을 만들라는 명령을내렸다.

1945년 2월 25일, 소련방위위원회는 유럽에서 귀중품을 훔쳐 가져오기 위한 ‘독일특별위원회’를 설립했다. 독일특별위원회는 유명 문화 및 예술 기관 종사자들인 미술, 미술사, 극장, 공예 등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민간인이었고, 임무는 비밀리에 진행했다. 연합군의 의심을 받지 않게 군복을 입었고, 정규군 속에 섞였다.

이들이 소련의 전리품 부대인 ‘트로피 여단(Trophy Brigades)’으로, 점령지에서 귀중품은 무엇이든지 소련으로 가져갔다. 나치 독일이 무너진 지 수개월 만에 소련 점령지인 독일 동쪽으로 수천 명이 넘어와 작품들을 마구 모아 모스크바로 보냈다. 물론 소련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산업 시설도 독일의 재무장을 막는다는 구실로 뜯어갔다.

■ 스탈린도 세계미술관 구상, 약탈품으로 채울 계획

1945년 소련 적군이 베를린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점령지의 미술관 소장품이 풍부한 것을 발견했다. 미국과 영국의 공습에 대비해 나치가 대피소에 숨겨둔 컬렉션도 찾아냈다. 가장 중요한 수집 대상은 산업 시설과 전략 물자들로, 이런 것을 소련으로 옮기는 것이었지만 예술품도 그대상이었다. 트로피 부대가 약탈한 주요 대상물은 미적 가치가 거의 없는 청동 제품으로, 나중에 모스크바에서 다 녹여버렸다.

처음에 소련은 약탈당한 예술품에 대해 나치 독일 미술관으로부터 같은 가치의 예술품으로 보상받고자 했다. 수많은 작품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했기에 2급 예술품을 훔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소련 전문가들이 작성한 등가 리스트에는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이탈리아에 있는 작품이 포함되었고, 대다수는 뮌헨,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함부르크와 같은 대도시 미술관 소장품이었다. 최종적으로 이 등가물의 가치는 1940년대 중반 가치로 7058만 달러로 추산되었다.

이 계산법에 따르면 독일에 있는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Sistine Madonna)’는 200만 달러, 최고가는 ‘페르가몬 제단(Pergamon Altar)’으로 750만 달러, 가장 싼 것은 베를린에 있는 이집트 컬렉션의 칼로 200달러로 평가했다.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한 유명 화가이자 미술사학자 이고르 그라바르(Igor Grabar, 1871~1960)는 등가 교환에서, 북유럽 대표적 르네상스 화가인 독일 출생의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 1484(?)~ 1545)의 작품 한 점은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er Jüngere, 1515~1586) 그림 한 점과 가치가 같다는 식으로 등급을 매겼다.

등가 교환은 합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가치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등가 약탈 난제에 대해 소련은 간단한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모든 것을 다 가져오라.”

소련은 단순히 상실한 것을 대체하는 차원을 넘어 ‘처벌’의 형태로 모든 문화재를 가져오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스탈린도 히틀러처럼 약탈 예술품으로 가득 채우는 미술관을 구상했다. 모스크바에 ‘세계 미술관(World Museum of Art)’을 설립하려는 구상이었다고 러시아 미술사학자 콘스탄틴 아킨샤(Konstantin Akinsha)와 그리고리 코즐로프(Grigorii Kozlov)의 공저 『아름다운 약탈: 소비에트의 유럽 예술품 탈취(Beautiful loot: The Soviet plunder of Europe’s art treasures)』(1995)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구상은 히틀러가 린츠에 세우려던 총통미술관 계획과 비교할 만하다. 군대를 동원한 전시 약탈품으로 미술관 컬렉션을 구축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모두 20세기 가장 괴물 같은 전체주의 정권이라는 면에서도 같다.

“러시아의 수많은 빼어난 예술품을 파괴하거나 약탈한 독일 파시스트 야만인들은 그들의 범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추축국 미술관은 놀라운 대작들로 가득한데 이는 보상으로써 소련으로 가져와야 한다. 추축국 귀중품을 모두 한곳에 모아 러시아의 영광을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기념물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글은 러시아 현대사 문서보관센터 자료에 실린 세계미술관 설립취지이다. 소비에트의 초대형 미술관 설립 구상은 그들이 추구한 정치이념인 마르크스주의 관점이 아니라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다. 침략자들에게 맞서 국민이 단합해 싸워 이겼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다행히 세계미술관은 총통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설립되지 않았다.

1298호 30면, 2023년 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