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21)

냉전의 서막 ➀

■ 소련의 ‘구조’ 선전 그리고 드레스덴 컬렉션의 반환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창조자들이 만든,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1950년대 초기부터 소련은 동유럽 괴뢰 국가들과 소통하면서 동독에는 드레스덴 미술관에서 약탈한 걸작을 포함해 전리품으로 획득한 예술품 반환 문제를 논의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 정부는 약탈한 예술품을 나치독일이 동굴에 처박아 썩혔다고 비난하면서 반쯤 훼손된 작품들을 소련군이 ‘구조했다’라는 식으로 선전했다.

연장선에서 승전 10주년이던 1955년 푸시킨 미술관은 드레스덴에서 구출한 걸작 전시회를 열었다. 개막식에서 니콜라이 미하일로프 당시 문화부 장관은 “걸작들은 한 번은 용맹한 적군이 나치로부터, 또 한 번은 미술관 복원 전문가에게 훼손 위기에서 두 번 구조되었다” 라고 자화자찬했다.

전시회가 끝난 다음 작품들은 동독으로 반환되었고, 동독의 베를린에서 처음 전시회가 열렸다. 그런 다음 드레스덴으로 반환되었다. 소련이 구조했다고 하지만 복원 작품의 상태는 조악했다고 한다.

1957년 소련과 동독은 「소비에트 연방에 일시 보관된 동독 문화재에 관하여」라는 포고령을 채택하고, 소련이 동독에서 훔쳐간 문화재와 독일이 소련에서 약탈한 예술품의 반환을 촉진하기 위한 위원회를 꾸렸다.

소련 문화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261만 4874점의 예술품이 전리품으로 소련으로 들어와 전역에 흩어졌다. 걸작을 구조했다는 신화를 이어가기 위해 소련 미술관들은 상태가 매우 열악한, 독일에서 강탈한 예술품 복원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반면에 동독은 소련에 반환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1959년까지 동독에 반환된 예술품은 156만 9176점이었다. ‘페르가몬 제단’은 포함되었지만, 트로이 보물은 제외되었다. 여전히 100만 점 이상이 소련에 전리품으로 남았지만, 1960년 소련은 예술품 반환은 그만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예술품 존재를 알리고 반환함으로써 생기는 이득과 비밀리에 서방과의 외교적 협상 도구로 사용하면서 챙길 수 있는 이익을 저울질한 결과로 보인다.

특히 서방과의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동시에 소련 정부는 국가 기밀로 분류하면서 전리품으로서의 문화재와 예술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는 반환도 과거의 떠들썩하게 한 것과는 달리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1967년 다시 한 번 반환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드레스덴에서 가져온 예술품 수십 점을 소련이 동독에 조용하게 돌려주었다. 마지막 반환이 이루어진 1986년까지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

그런 과정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예술품을 비밀리에 보관하는 창고가 소련에 있다는 폭로가 나왔고, 1991년 10월 니콜라이 구벤코 문화부 장관이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트로이 보물에 관한 질문에 그는 행방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소련이 무너진 지 몇 년이 흐른 1995년 초, 모스크바에 있는 푸시킨 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서방에서 실종된 작품을 엄선하여 경쟁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푸시킨 미술관은 전시회를 열면서 나치에 대한 러시아의 승리와 초토화된 지역에서 작품 보존을 의미한다는 뜻으로 ‘두 번 구조’라고 이름 붙였다. 전시회 시기는 러시아가 나치 독일에 싸워 승리한 50주년에 맞춘 것으로, 우연은 아니다.

푸시킨 미술관은 그리스에서 태어난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과 마네(Edouard Manet,1832~1883)의 1879년에서 1890년 경의 작품 ‘로지타 모리의 초상화(Portrait of Rosita Maury)’를 비롯해 아버지 루카스 크라나흐, 베로네세, 드가, 도미에, 르누아르, 틴토레토, 고야의 작품과 스케치 등 63점을 전시했다.

몇 주 뒤에 에르미타주는 전시회에서 모네, 고갱, 세잔, 르누아르, 반 고흐 등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74점을 선보였다. 많은 전시 작품은 개인 소장품에서 약탈한 그림이라 그동안 일반 대중에게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1995년 3월 30일자 기사에서 전시회를 약탈 문화재와 관련해 갈지자 행보를 한 러시아가 정직성을 보인 큰 도약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푸시킨 미술관이 전시한 고야의 ‘카니발’과 르누아르의 ‘국화와 일본 부채(Bouquet of Chrysanthemums and a Japanese Fan)’ 두 점은 나치에 살해된 유대계 헝가리인 소유의 작품이라 비판이 집중되었다. 러시아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고, 그 작품들을 어떻게 확보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해 비난 세례를 받았다. 그럼에도 러시아 큐레이터들은 전시회 성공에 한껏 들떴다.

다음 해인 1996년 푸시킨 미술관은 트로이 최후의 왕 프리아모스의 이름을 딴 보석전을 열었다.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이 오늘날 터키에서 발굴한 청동기 유물 260점을 선보인 것으로, 전시회가 열렸을 때 독일과 터키가 동시에 유물의 반환을 요구했다. 물론 러시아는 어느 측의 요구도 들어줄 의향이 없었다.

1998년 4월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종전 이후 독일에서 러시아로 넘어온 모든 문화재는 법적으로 러시아 국가 재산이라고 규정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즉 러시아 정부의 허락 없이는 다른 나라나 원래 합법적인 소장자에게 반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듬해 러시아 헌법재판소는 이 법률이 합헌이라고 지지했지만, 과거 나치 희생자가 소유했던 예술품에 대해서는 예외라며 회복의 길을 반쯤 열어놓았다.

1300호 30면, 2023년 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