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24)

냉전의 서막 ➃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창조자들이 만든,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 트로이 보물과 다른 운명, 돌아간 페르가몬 제단

소련이 약탈 대상에서 최고가로 평가한 ‘페르가몬 제단(Pergamon Altar)’은 B.C. 180년 전후에 조성한 고대 그리스 대리석 조각이다. 페르가몬은 오늘날 에게해 인근 터키에 위치한 베르가마 지역으로,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Ⅲ, B.C. 356~B.C. 323) 사후에 영토 등이 분할되면서 세워진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다. 그리스 영향을 받은 도시였지만 기원전 2세기 로마에 복속되었다.

‘페르가몬 제단’은 웅장한 이오니아식 기둥, 그리스 신들과 티탄 간의 전투를 묘사한 부조가 빼어난 인류 문화재다. 제단은 고대 후기에 기독교가 퍼지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부조가 새겨진 돌 조각(판넬)은 수백 개에 이른다. 그 구조물 가운데 큰 것은 너비35미터, 높이 33미터에 이른다.

1878년, 독일이 발굴하여 베를린으로 반출했다. 1901년부터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전시되다가 1939년 전쟁이 일어나자 박물관이 문을 닫았다. 1941년 부조들은 해체되었고, 전쟁 말기 베를린 동물원 대피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제단을 해체할 때 독일은 40명이 달려들어 4주가 걸렸다.

하지만 소련 적군의 탈취는 전광석화였다. 소련군은 영국군과 미국군이 동물원이 위치한 베를린 지역을 관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접하는 순간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았다. 1945년 소련군 300여 명이 달려들어 단 이틀 만에 해체했다. 대리석 조각들은 베를린에서 나온 수많은 다른 작품들과 같은 운명으로 기차에 실려 레닌그라드로 향했다. 소련군이 페르가몬 제단을 서둘러 싣고 간 것은 자신들의 행위가 ACC의 방침과는 충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1958년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제우스 대제단’, ‘제우스 신단’으로도 불리는 페르가몬 제단은 1958년 가을 소련을 떠나기 전에 모스크바 등에서 전시되었다. 이후 소련은 페르가몬 제단과 드레스덴 미술관에 걸려 있었던 그림 1000여 점을 선의의 표시로 동독 정부에 ‘기증’했다.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은 2023년 개관 예정으로 개・보수에 들어간 상태다.

트로이 보물이나 페르가몬 제단은 독일이 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발굴해 가져갔다가 소련에 약탈당했지만, 독일로 반환되기까지 그 운명이 갈렸다. 이집트에서 온 절세 미녀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연합군, 즉 MFAA가 발견하여 서독으로 돌아갔다. 인류 공동의 유물을 반환하는 데에도 냉전의 정치 이념이 작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이 조성한 이 석조물을 그리스의 앙숙인 터키가 반환을 요구하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 창문 넘어 보듯⋯천사 그림의 ‘시스티나 성모’

소련이 약탈 대상으로 삼은 목록에서 최고급에 오른 또 한 점은 ‘시스티나 성모’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 라파엘로(Laffaello, 1483~1520)가 1513년에 그린 명화다. 그림은 대전 직전까지 드레스덴 미술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적군이 1945년 5월 드레스덴에 도착했고, 앞서 그해 2월 영국과 미국의 대공습으로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다. 트로피 여단이 드레스덴 바로 서쪽 그로스 코타 마을로 가는 도중 축축한 터널에 멈춰 서 있는 기차 객차를 수색하다가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에 온도계가 달려있어 범상치 않다고 생각해 열어보니 ‘시스티나 성모’가 나왔다.

‘시스티나 성모’는 원래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재위 1503~1513)의 분묘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 아래에 있는 날개 달린 두 천사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듯 세상을 보는 모습은 우표, 엽서, 티셔츠 등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전리품 부대는 그로스 코타에서 발견한 대가의 걸작들을 약탈했다. 이곳에서 네덜란드의 대가 렘브란트가 1635년에 그린 ‘가니메데의 겁탈(Rape of Ganymede)’, 렘브란트가 아내와 함께한 초상화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초상화(Self-Portrait with Saskia)’,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ne)의 1508년 작품 ‘잠자는 비너스(The Sleeping Venus)’, 유명 화가 티치아노(Tiziano)가 1561년경에 그린 ‘부채를 든 소녀’로도 불리는 ‘흰옷 입은 여성의 초상화(Young Woman in White)’, 스페인 화가 호세 데 리베라(Jose de Ribera)의 1641년 작품 ‘성녀 아그네스(Saint Agnes)’ 등 400여 점이 발견되었다.

그로스 코타에서 발견한 예술품들은 스탈린이 국가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할 만큼 트로피 여단에는 대단한 성과였다. ‘시스티나 성모’를 비롯한 일부 그림은 스탈린이 사망하고 전쟁이 끝난 지10 년 뒤인 1955년 ‘소비에트와 동독 국민과의 우의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동독에 반환되었다.

드레스덴에서 발견된 두 번째로 중요한 창고는 베젠슈타인(Weesenstein) 성으로, 렘브란트의 동판화 40여 점과 19세기 독일 그림 등 500점의 작품이 나왔다. 세 번째 보물 창고는 드레스덴 근처의 낡은 헛간과 환기가 되지 않는 어둡고 축축한 광산으로, 트로피 여단은 이곳에서 일부 작품이 훼손된 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작품은 티치아노, 렘브란트, 보티첼리의 작품이었다.

트로피 여단은 드레스덴에서 발견한 예술품들을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스탈린은 급전으로 드레스덴의 예술품을 운송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하다”라고 선언했다.

1303호 30면, 2023년 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