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23)

‘금융 왕가’도 피할 수 없었던 약탈 그리고 회복 ①

■ 나치 약탈의 표적 첫 번째, 로스차일드 컬렉션

전쟁 전, 유럽을 금융으로 지배하는 데 성공한 유대인 가문 로스차일드(Rothschild)도 나치 약탈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에 살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컬렉션은 히틀러와 괴링의 것으로 분류되어 약탈되었지만 결국 연합군 MFAA가 고스란히 되찾아 반환했다.

나치가 표적으로 삼은 그 집안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거리 게토에 살던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가 그곳에 은행을 세워 부를 축적했다.

마이어는 프랑크푸르트 인근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헤센카셀 제후인 빌헬름 공의 재정을 담당하는 상인으로 임명되면서 금융업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그는 다섯 아들을 통해 유럽 각국의 주요 도시에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맏아들 암셸 마이어 폰 로스차일드(Amschel Mayer von Rothschild, 1773~1855) 남작은 부친의 근거지인 프랑크푸르트를 물려받았다. 둘째 잘로몬(Salomon, 1774~1855)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셋째 네이선(Nathan, 1777~1836)은 영국 런던에서, 넷째 카를(Carl, 1788~1855)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다섯째 아들 제임스(James, 1792~1866) 남작은 프랑스 파리에서 각각 은행을 설립했다.

로스차일드가家는 유럽 전역을 연결하는 거대한 국제 네트워크 구축에 성공하면서 금융 왕가를 일궜다. 또한 정계 진출 제약의 한을 달래듯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열성적인 예술 수집가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나치가 혐오한 유대계이자 경제적으로 부유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치의 공적(公敵)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가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직후인 3월 30일 나치와 오스트리아 박물관 직원들이 잘로몬의 후손인 알폰스(Alphonse, 1878~1942)와 그의 동생 루이스(Louis, 1882~1955)의 저택에 들이닥쳐 모조리 가져갔다. 알폰스의 궁궐 같은 집에서 예술품 3,444점, 루이스 저택에서 919점과 동전 및 메달, 문서 다수를 털어갔다. 병합 이후 로스차일드의 빈 가문이 나치의 사실상 첫 번째 약탈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전쟁 기간에 약탈된 로스차일드 컬렉션은 옮겨 다니다 1944년까지 잘츠부르크 인근 알타우제 소금 광산에 숨겨졌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컬렉션을 미군이 발견해 오스트리아 정부에 반환했다. 가문의 컬렉션 상자에는 ‘알폰스 로스차일드’를 줄인 ‘AR’과 ‘루이스 로스차일드’를 줄인 ‘LR’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작품 대다수는 그대로였지만, 공예품 등 상당수는 빈에 있는 국영 경매장 도로테움을 통해 팔려 나가면서 행방불명된 상태이다.

■ 로스차일드 후손 인질, 석방 몸값 사상 최고액인 4500억 원

나치가 빈에 들어왔을 때 알폰스 부부는 영국 런던에 머물고 있어 체포를 면했고 1940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가문의 빈 은행 업무를 총괄하던 동생 루이스는 1938년 3월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끌려가 구속되었다. 나치는 경제 위기의 희생양으로 유대인과 로스차일드가문을 본보기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구속된 지1 년여 만인 1939년 7월, 천문학적인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가 미국으로 탈출했다.

루이스의 몸값 협상에는 히틀러의 각료들과 루이스의 파리와 런던 친구들이 나섰고, 역시 친구인 영국 윈저 공이 그 보증을 섰다. 윈저 공은 사랑을 위해 영국 국왕 자리를 버린 에드워드 8세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치에 지불한 그의 몸값은 2100만 달러였다. 개인에 대한 사상 최대의 인질 몸값이었다. 1939년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2100만 달러를 2020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3억 8546만 달러에 이른다. 우리 돈으로 4500억 원이 넘는다. <뉴욕타임스>는 1955년 1월 16일자 루이스 부음 기사에서 역대 최고의 몸값이라고 평했다.

1942년 알폰스가 사망하자 부인 클라리스(Clarice de Rothschild, 1894~1967)는 전후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재산을 돌려받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사실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빼앗긴 재산의 반환을 주장하는 유대인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에 사는 유대인 약3분 의 1인 6만5000여 명이 사망했고, 남은 유대인 대다수는 망명했기 때문이다.

가문의 컬렉션 회복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띤 클라리스는 전후, 대다수 유대인이 그랬듯 반(反)유대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스멀거리는 오스트리아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 문화재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는 오스트리아 법령 때문에 클라리스는 가문의 컬렉션을 포기하고 쉽게 떠날 수도 없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전쟁 희생자들의 예술품 해외 반출을 허가하지 않았을뿐더러, 되레 망명하려는 유대인들의 예술품을 노렸다. 오스트리아미술관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해외 반출 허가서가 나왔으며, 로스차일드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클라리스는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250점을 ‘기증당’하고서 나머지 예술품을 미국행 이삿짐 배에 실을 수 있었다. 클라리스의 딸 베티나(Bettina, 1924~2012)는 “당시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산은 예술품뿐이었고, 엄마와 삼촌 루이스는 오스트리아 정부 조치에 매우 실망했다”라고 회상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술품 획득의 정당성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바뀌고, 사회 분위기가 취득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시작되었다. 이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국가 회복법(반환법)을 제정해 많은 유대인에게서 강제로 기증받은 예술품들을 돌려주었다. 이에 베티나도 1999년 강제 기증한 예술품 224점 3200만 달러 상당을 돌려받았다. 베티나는 돌려받은 상당수 작품과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록, 보석류 등 186점을 훗날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기증했다.

베티나의 기증품 가운데 영국 초상화가 조지 롬니(George Romney, 1734~1802)의 1802년경 작품 ‘엠마 하트의 초상화(Portrait of Emma Hart)’가 최고가로 추정된다. 롬니가 100번 이상 앉혀 그렸던 ‘해밀턴 부인(Lady Hamilton)’ 는 미술 모델 역사에서 전설적인 정부(情婦)로, 영국전쟁 영웅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과의 스캔들로도 유명하다.

1304호 30면, 2023년 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