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품 반환의 역사는 깊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 유명 정치인이자 작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기원전 73년부터 3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베레스(Gaius Verres, BC 120?~BC 43)를 유물과 예술품을 훔쳤다며 재판에 넘겼다. 전쟁이 아닌 평화시의 약탈과 절도이지만 베레스는 ‘로마에 대한 불충’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판결 직후 그가 시칠리아 사원 등에서 탈취한 유물들은 그대로 복원되었다. 문화재와 예술품 반환의 최초 기록 사례다. ‘정복 제국’ 로마에도 반환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다.
문화재를 대규모로 약탈한 나폴레옹을 격퇴한 영국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 공작도 약탈품을 유럽의 원래 소유국으로 돌려줄 것을 영국 정부에 건의했다. 영국과 프로이센 등 연합국 대표들은 1815년 9월 파리를 점령했지만 이런 연유로 파리의 루브르는 전승국의 약탈에 짓밟히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챙기던 당시 관행으로서 이 조치는 매우 이례적인 행태였고, 전시 약탈 문화재를 원래의 장소에 반환하자는 원칙이 탄생했다. ‘빈 회의 원칙’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페루가 전 세계 여론을 환기하고 상대국 대통령과 교황까지 움직여 마추픽추 유물을 돌려받을 수 있었듯 우리도 모든 역량을 모아야 문화재 한 점을 환수할 수 있다. 환수된 문화재는 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는 자긍심을 주기 위해서라도 진정한 제자리 회복이 이뤄져야 하겠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금융 왕가’도 피할 수 없었던 약탈 그리고 회복 ➁
■ 등가 교환한 로스차일드 ‘실록’, 러시아도 반환 주목
금융 왕국 로스차일드 가문은 소련 트로피 여단이 약탈한 ‘왕가 실록’인 기록물을 러시아로부터 다소 특이하게 환수했다.
이 기록물은 1769년 빈에서 사업하던 잘로몬 계보의 은행 가문에 속했지만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과 합병된 직후 로스차일드 은행과 저택 그리고 예술품뿐만 니라 가족의 세부 기록물도 빼앗았다. 압수된 문서들은 예술품과 같이 대피되지 않고, 게슈타포가 베를린 창고로 빼돌렸다가 연합군의 공습이 강화되자 폴란드 서남부 바우브지흐 성으로 옮겼다.
이 기록물은 가족사로 볼 때 신앙적 중요성이 있지만,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 전리품 부대가 이 기록물들을 다시 약탈해 모스크바로 가져갔다. 1993년과 1999년 29개의 문서 상자에 담긴 419개의 파일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러시아 정부에 비밀리에 반환을 요청했다. 소련과 그 뒤를 이은 러시아 정부는 약 4만 건의 문서가 들어 있는 이 기록물은 비록 예술품은 아니지만 문화재 수준으로 분류해 엄격히 관리했다.
드폴대학 <예술, 기술 및 지적재산권법 저널> 2004년 가을호에 따르면, 이 기록물들은 가문의 역사에서 의미가 매우 깊다. 1840년대 잘로몬과 그 후손들이 모은 기록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에서 족보 이상의 중요 문서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지리적 범위를 개괄한 해외 네트워크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와 빈 가문은 함께 사업했으며, 스웨덴과 중부 유럽, 이탈리아까지 뻗어 은행업을 함께 했음을 보여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 스페인에서 철도 사업과 이탈리아에서 전기사업,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석유 거래와 광산업에도 진출했다. 은행으로서 대출해준 정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스웨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일본이 포함되어 있다. 유럽의 국왕과 군주들에게 개인적으로 대출해준 기록도 남아 있다.
로스차일드가는 러시아에 기록물 반환을 은밀히 타진하면서 반환 협상에 잘 응하려고 반환의 등가물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농노제 폐지, 군사 및 교육 개혁을 주도한 제정 러시아 ‘개혁 군주’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1881)가 1866년부터 14년 동안 연인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Yekaterína Dolgorúkova, 1847~1922) 황후에게 쓴 연애편지 등 1만 2000건과 그녀가 보낸 답신 1435통이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것을 발견하고, 교환할 등가물로 사들였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함으로써 개혁이 좌초된 러시아는 결국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 유명한 ‘그리스도 부활의 성당’에는 그가 폭탄 테러로 암살당할 때 흘린 피가 남아 있어 이 성당을 ‘피의 사원’이라 할 정도로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를 각별하게 여긴다.
로스차일드 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거의 10년 만인 2002년 6월 러시아는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군사문서고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서 29박스를 꺼내주고 황제의 연애편지 등을 받으면서 ‘교환’ 형식으로 회복이 이루어졌다. 돌려받은 문헌들은 런던에 있는 로스차일드 문서보관소로 들어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중으로 약탈당한 기록물을 되찾은 방식은 등가 교환의 형식이었지만,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새로 출범한 법에 따라 독일을 제외한 다른 국가나 개인에게 반환하기는 처음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1305호 30면, 2023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