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25)

“모나리자를 지켜라” 루브르의 특급 비밀작전 ➀

■ 루브르의 특명, “모나리자를 빼앗기지 마라”

루브르박물관 ‘최고의 스타’ ‘모나리자(Mona Lisa)’는 어떻게 나치 약탈의 마수를 피했을까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 작품 34만여 점 가운데 단연 최고로 꼽히는 ‘모나리자’는 히틀러의

‘머스트 해브 리스트Must have List’ 최상단에 있었다.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1503~1506년에 그린 ‘모나리자’는 서울시민과 비슷한 규모인 연간 970만 명이 찾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인 모나리자를 히틀러가 약탈하지 못한 데는 자크 조자르(Jacques Jaujard, 1895~1967)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내

전 당시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컬렉션을 스위스로 대피시켜 대량 파괴의 위기에서 구하기도 했다.

독일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국립루브르박물관 부관장이었던 조자르는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나치가 프랑스를 침략하고, 폭격과 약탈, 절도 등으로 문화재의 대량 파괴가 뒤따르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루브르의 회화관 큐레이터 르네 위그(Ren Huyghe)와 함께 그림만 3600점에 이르는 소장 예술품을 거의 모두 분산시키기로 비밀 계획을 짰다. ‘모나리자’와 같은 온전한 크기뿐만 아니라 대작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 8월 25일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이 불가침조약을 발표하자 조자르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루브르를 수리한다는 핑계로3 일간 휴관하면서 계획대로 치밀한 실행에 들어갔다. 루브르 직원과 인부, 학생을 동원해 되도록 그림은 액자에서 떼어내고, 조각은 나무 상자에 담았다. 사흘 만에 200여 명이 그림 3600점과 조각, 예술품, 고대 유물 등을

상자에 넣어 포장했다.

작품에는 모두 대피 우선순위를 알리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노란색 점은 대다수 컬렉션에, 녹색 점은 중요한 작품에 붙였다. 빨간색 점은 세계적 보호 대상으로 위대한 유물에 붙였다. ‘모나리자’는 루브르가 소장한 컬렉션 가운데 유일하게 빨간색 점 세 개가 붙었다.

■ 빨간색 점 세 개를 붙인 모나리자, ‘구급차’로 후송

사흘 뒤인 1939년 8월 28일, 트럭 203대가 동원되어 고대 유물 1000상자, 회화 268상자 등 모두 1862개의 나무 상자를 싣고 중서부 지방 르와르 계곡에 있는 ‘샹보르(Chambord) 성’으로 갔다. 샹보르 성에는 예술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공간이 있었다.

조자르는 약탈을 막기 위해 모나리자가 든 상자에 암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림들에 코드를 부여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어떤 상자에 대작이 들어 있는지를 자신에게 알리도록 했고, 나중에 상자에 빨간색으로 코드 ‘LP0’라는 식으로 써두었다. LP는 루브르 회화(Louvre Paintings)를, 숫자는 일련번호를 의미한다. ‘모나리자’는 루브르의 다른 컬렉션과 함께 샹보르 성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러나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아둘 수 없듯 이곳에서 작품들은 다시 분류되어 시골 지역의 다른 성, 미술관, 수도원 등으로 나누어 보관되었다.

1939년 11월 모나리자는 진격해 들어오는 나치 독일군의 손에 닿지않도록 하고자 샹보르 성에서 다시 서북쪽에 있는 ‘루비니(Louvigny)성’으로 옮겨갔다. 모나리자는 다시 들것에 얹혀 이번에는 장갑차를 타고 이동했다. 장갑차에 실린 모나리자 상자는 이동하는 동안 습도를 일정하기 유지하기 위해 밀폐했다.

조자르와 박물관 직원들은 프랑스 문화재가 나치나 나치 괴뢰정부인 비시 정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헌신했다. 물론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직간접으로 접촉하며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이 분산 보관된 성에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지 않도록 조치했다. ‘모나리자’는 대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몇 차례 더 이동했다.

1940년 6월, 프랑스의 항복이 다가오고,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피난민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프랑스의 북부에서는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가 막혔다. 루브르 작품들은 다시 독일이 점령한 북부에서 벗어나 비시 괴뢰정권의 ‘자유 지대’로 알려진 남쪽으로 이동했다.

모나리자는 ‘록디외(Loc Dieu)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이 수도원은 과거 백년전쟁 때 1409년에 불탔으나 1470년에 복원되면서 미래의 재난에 대비해 요새로 만든 안전지대였다. 모나리자를 운반하는 사람들은 이동할 때마다 그 위치를 암호로 보고했다.

1940년 8월 16일, 히틀러가 임명한 프랑스 예술품 수집 책임자인 프란츠 폰 볼프-메테르니히(Franz von Wolff-Metternich) 백작이 루브르박물관에 도착해보니 텅 비어 있어 안도했다고 조자르가 생전에 회고했다. 메테르니히 백작은 다른 많은 귀족과 마찬가지로 나치 당원이 아니었고 ,프랑스 예술품을 비밀리에 지키려는 조자르를 도왔다.

예술품을 지키는 데 협력자가 된 이들의 이야기는 2015년 영화 ‘프랑코포니아(Francofonia)’에 소개되기도 했다. 전쟁 후에 평화가 찾아온 1952년, 메테르니히는 조자르의 추천으로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를 받았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록디외 수도원은 모나리자와 다른 대작을 보호하기에 좋은 선택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술품을 보호하던 이들은 습기 찬 환경이 작품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우려해 4개월 만에 다시 이삿짐을 챙겼다. 모나리자와 그 친구들은 다시 더 남쪽으로 내려가 툴루즈에서 북쪽으로 53km 떨어진 몽토방에 있는 ‘앵그르(Ingres) 미술관’

에 자리 잡았다. 모나리자는 이곳에 1940년 10월 3일 도착해 2년 넘게 머물렀다.

그곳에 재앙이 두 번 닥쳤다. 1941년 12월 느슨해진 건물 천장들보가 루브르 작품들이 보관된 방으로 내려앉았지만, 다행히 모나리자는 다치지 않았다. 1942년 8월에는 폭우로 앵그르 미술관에 물이 들어차 그림 69점이 젖었지만 모나리자는 수마를 피했다

1306호 30면, 2023년 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