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28)

한국전쟁 때 해외로 피난 간 문화재, 우리 문화재를 지켜라 ➀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 사흘 만에 점령된 서울, 의인들이 지킨 문화재

우리 문화재와 예술품들은 파괴와 약탈의 전쟁에서 어떻게 위기를 넘겼을까.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 6월 북한의 기습 공격에 서울은 단 사흘 만에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은 피난하기에 급급했지만, 우리 문화재와 유물의 안위는 고스란히 박물관 직원들이 떠안았다.

물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동종을 지켜낸 오대산 상원사의 방한암(1876~1951) 스님이나 해인사 포격을 거부해 『팔만대장경』을 구한 ‘빨간 마후라’ 김영환(1921~1954) 장군, 지리산 화엄사를 살린 차일혁(1920~1958) 경무관과 같은 문화재 의인들도 있었지만,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는 박물관 직원들의 헌신이 지대했다.

전쟁 직후 북한의 내각 직속 ‘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가 국립박물관의 소장품과 간송 전형필 컬렉션을 북한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박물관 직원들이 유물 포장에 지연작전을 펼치는 사이 전세가 뒤바뀌면서 북한군들은 모든 유물을 내팽개치고 북으로 달아났다.

이들의 지연작전은 전쟁에서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고 김재원(1909~1990)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이 저서 『경복궁 야화』(탐구당, 1991)’에서 털어놓았다.

국립박물관이 1962년 공개한 한국전쟁 피해 현황을 보면 경복궁 만춘전에 보관하던 도자기와 의상 등 3,000여 점이 1950년 9월 24일 폭격으로 멸실되거나 훼손되는 등 피해 소장품이 무려 7109점에 이른다. 당시 만춘전이 처참하게 훼손된 참상이 사진으로 전한다. 반면 당시 부산으로 피난한 국립박물관 소장품 256상자 1만 21점, 덕수궁 미술관 소장품 174상자 8862점으로 약 1만 9000점은 박물관 직원들이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 목숨을 건 보호 덕분에 오늘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

■ 한국 첫 미술 전문기자 이구열이 전한 긴박했던 박물관

전쟁 통에 긴박했던 당시 국립박물관 서울 본관의 모습을 한국 최초의 미술 전문기자 이구열(1932~2020) 선생은 『한국문화재 비화』(한국 미술출판사, 1973)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한국문화재 비화』는 그가 <서울신문> 기자로 활동하던 1972년 5월 22일부터 11월 7일까지 100회에 걸친 특별기획 시리즈 기사 ‘문화재 비화’를 묶어낸 책이다. 다음은 한국전쟁 당시 문화재 보호와 관련된 화급했던 상황을 기사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전격적으로 남침을 감행한 1950년 6월 25일은 전쟁 도발자가 치밀하게 계산한 일요일이어서 국립박물관(지금의 경북궁 학 예술원 건물)엔 책임 있는 직원이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김재원 관장이 그의 사택으로 급히 달려온 박물관 연구원 최순우씨로부터 사태의 위급함을 안것은 그날 오후였다. 서울 거리는 벌써 완전히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외출 혹은 휴가 장병의 즉시 귀대를 독촉하는 급박한 목소리가 거듭 울리고 있었다.

26일 아침, 모두 불안스럽게 출근한 박물관 직원들은 정확한 전황을 알 길이 없는 채 만약에 대비한 비상조치를 서둘렀다. 진열장에서 모든 유물과 미술품들을 꺼내 안전한 창고 속에 격납했다.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 박물관 소장의 국가 문화재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임무였다.(중략)

28일, 공산군이 마침내 서울에 들어오고, 박물관은 고립되고 말았다. 박물관 직원 가운데 유물 보호를 포기하고 혼자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탈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김 관장 이하 모든 직원은 경복궁 안의 관사를 중심으로 모여 전세의 귀추를 초조하게 지켜 볼 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7월 5일께였다. 북에서 온 이른바 물질문화조사보존위원회의 서울 지구 책임자라는 김 모가 박물관을 접수한다고 찾아왔다. 그는 뒤 켠의 관사에서 직원들을 불러내어 유물 보호를 계속 맡도록 말할 뿐 당장은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김 관장만 관사에 연금당한 상태였다.

6・25로 정체를 드러낸 공산당원 하나가 박물관에도 있었다. 사진실에 근무하던 김영욱이었다. 그가 박물관 책임자로서 상부 공산당 조직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상 성분이 비교적 온건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박물관 직원들은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8월에 들어서자 B-29의 실지 서울 폭격이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도심지나 고궁은 피했기 때문에 박물관 창고의 유물은 안전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박물관에 김 모가 다시 나타나 전세의 악화를 뜻하는 유물 소개(疎開)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라는 심각한 지시를 해왔다. 북으로 실어가려는 건지, 아니면 서울 안의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빨리 모든 유물을 포장하라”고 그는 독촉했다.

그러나 수만 점의 박물관 물건을 모두 포장하여 신속히 이동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큰 철조(鐵造)와 석조(石造) 미술품은 그대로 두고, 중요하고 작은 것만 수천 점이 포장되었다. 그것들은 일단 경복궁에서 덕수궁 미술관의 더 완벽한 지하창고로 옮겨졌다. 덕수궁 미술관(당시 관장은 이규필) 소장의 미술품들도 중요한 것은 역시 모두 포장되어 지하창고로 내려와 있었다.

1309호 30면, 2023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