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35)

폴란드, 그단스크 컬렉션 반환 거부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는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빠져 폴란드에 있는 서부 유럽 문화재와 예술품을 약탈하고, 슬라브 문화재를 파괴했다. 소련도 침략 후 폴란드 예술품과 문화재를 약탈하고, 파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련이 장악한 지역의 미술관과 공공기관의 거의 절반이 해체되어 수많은 약탈품이 모스크바 역사박물관과 반종교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소련의 약탈이 1947년까지 계속되면서 폴란드는 나치와 소련의 ‘이중 약탈’에 신음했다. 201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전쟁 기간 폴란드가 파괴와 약탈로 상실한 문화유산은 전체의 75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폴란드 화가 작품 1만 1000점, 유럽 다른 국가 출신의 화가 작품 2800점, 조각 1400점, 원고 7만 5000장, 지도 2만 5000장, 1800년 이전에 출판된 도서 2만 2000권, 판화 30만 점, 예술적・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 수십만 점 등이다. 약탈되거나 파괴된 도서는 적게는 150만 권에서 많게는 2200만 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 기상천외한 폴란드 영토 분할 ⋯문화재 운명 갈려

폴란드의 예술품 반환 문제가 꼬인 것은 그단스크 미술관이 함축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말로 치닫던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소련 정상들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만났을 때 스탈린이 처칠과 루스벨트에게 기상천외한 제안을 내놓으면서 비롯되었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1939년부터 장악한 폴란드 동부 영토를 전쟁 완충지대이기에 포기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대신 폴란드는 서부 국경을 서쪽으로 더 이동하여 소련에 빼앗긴 땅을 독일로부터 보상받으라고 제의한 것이었다.

그 결과, 폴란드는 동쪽의 커즌선(Curzon line)에 따라 소련과 국경선을 그으면서 동부 지역을 잃었다. 이곳은 결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로 독립하면서 러시아 땅도 되지 못했다.

폴란드는 서쪽으로 국경선을 250킬로미터를 옮겼고 이에 따라 보상받은 ‘오데르-나이세 선’이 결정되면서 독일로부터 그단스크와 함께 엄청난 넓이의 영토를 획득했다.

오데르-나이세 선은 발트해에서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을 따라 결정된 국경선으로, 독일은 오스트리아 병합 이전인 1937년 기준으로 국토의 4분의 1을 폴란드와 소련에 내주었다.

영토 관할권과 그 안에 남은 예술품 문제는 전후 처리 및 배상, 예술품 반환 문제와 맞물려 더욱 복잡해졌다.

네덜란드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 후손들은 폴란드 당국이 약탈된 작품들의 이력을 추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는 비영리 민간기구로, 약탈품 회복 운동을 펼치는 유럽약탈예술품위원회Commission for Looted Art in Europe, CLAE 설립자이자 공동 의장인 앤 웨버Anne Webber는“폴란드는 이런 작품들을 반환하려고 미술관이나 국가 또는 정치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라고 단언한다.

홀로코스트 약탈 문화재 반환에 관한 워싱턴 회의 당시 미국 국무장관 보좌관을 지낸 스튜어트 아이전스탯Stuart E. Eizenstat은 폴란드 역시 서명한 ‘워싱턴 원칙’에 부응하는 데 실패한 국가들 가운데 한 나라라고 지목했다.

폴란드가 반환에 소극적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에 여전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배상은 현금이 아니라 물질과 기반 시설, 식량의 형태로 소련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의 실질적인 배상은 없었다. 아르카디우스 물라르치크 폴란드 집권당 의원이자 의회 배상금 위원장은 “유대인은 보상받았지만, 나이 든 폴란드 국민은 단1 유로도 보상받지 못했다. 이런 것에 매우 신경이 날카롭고, 분노한다”라고 주장한다. 전후 배상과 관련해 폴란드 국민의 이런 정서가 약탈 문화재와 예술품 회복을 더욱 복잡하게 한다.

미국이 1998년 12월 주도한 이 원칙의 정식 명칭은 ‘나치에 몰수된 예술품에 관한 워싱턴 회의 원칙’이지만 편의상 ‘워싱턴 원칙’으로 줄여 부른다. 워싱턴 원칙은 청구인이 박물관 소장품의 내력과 출처에 대해 약탈이라고 주장하면 박물관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국가별로 사법 체계가 달라 구속력은 없고 나치 시대로 한정되어 있지만, 문화재 회복에서는 세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원칙이 되었다. 문화 예술품의 취득 적법성을 소장자인 박물관이 불법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책임을 지운 것이 큰 특징이다.

■ 전문가들 ‘폴란드 문화재 반환 실무단’ 구성 제안

전문가들은 폴란드가 독일에 보상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할지에는 회의적이다. 독일은, 폴란드 정부의 보상 요구는 진실이 담겨 있지만, 어느 정도는 유권자들을 향한 국내 정치 게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폴란드와 네덜란드 당국자들이 이미 폴란드에 있는 것으로 추적이 끝난 예술품 수십 점의 반환과 관련해 ‘공동 실무단’을 꾸리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또 폴란드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는 다른 국가들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폴란드가 약탈당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어떤 것이든 돌려준다는 원칙을 폴란드에 확신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폴란드 역시 대전 당시 예술품과 문화재 약탈의 최대 희생 국가인 까닭이다.

그단스크에 남은 나치 약탈품은 어떻게 폴란드 정부가 소유하게 되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 독일이 단치히를 점령한 채 끝났다. 앤 웨버 유럽약탈예술품위원회CLAE 공동 의장은 “독일인들은 폴란드 박물관을 약탈 예술품의 보관소로 이용했다”라고 설명한다. 베를린에 보내지 않고 단치히에 모아둔 작품들은 나치의 체제 우위를 자랑하는 무대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1945년 포츠담 협정 결과로 단치히는 이름이 그단스크로 바뀌면서 폴란드에 귀속되었고, 그곳에 남은 작품들은 폴란드가 공산화되면서 국유화되었다.

1316호 30면, 2023년 5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