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50)

에티오피아 국보급 왕관 네덜란드에서 21년간 숨긴 배경 ②

약탈품 반환의 역사는 깊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 유명 정치인이자 작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기원전 73년부터 3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베레스(Gaius Verres, BC 120?~BC 43)를 유물과 예술품을 훔쳤다며 재판에 넘겼다. 전쟁이 아닌 평화시의 약탈과 절도이지만 베레스는 ‘로마에 대한 불충’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판결 직후 그가 시칠리아 사원 등에서 탈취한 유물들은 그대로 복원되었다. 문화재와 예술품 반환의 최초 기록 사례다.
이런 전통은 안토니오(Marcus Antonius, BC 82~BC 30)가 소아시아 도시들에서 약탈한 유물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가 돌려주면서 ‘정복 제국’ 로마에도 반환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다.
문화재를 대규모로 약탈한 나폴레옹을 격퇴한 영국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 공작도 약탈품을 유럽의 원래 소유국으로 돌려줄 것을 영국 정부에 건의했다. 영국과 프로이센 등 연합국 대표들은 1815년 9월 파리를 점령했지만 이런 연유로 파리의 루브르는 전승국의 약탈에 짓밟히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지 않았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챙기던 당시 관행으로서 이 조치는 매우 이례적인 행태였고, 전시 약탈 문화재를 원래의 장소에 반환하자는 원칙이 탄생했다. ‘빈 회의 원칙’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약탈당한 나라가 어디 한국뿐이랴. 중국과 대만을 비롯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그렇다. 아프리카와 아시아권의 약탈 문화재 반환에 대해 이젠 식민제국주의를 거쳤던 국가들이 답할 차례이지만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그냥 돌려주지 않는다.
페루가 전 세계 여론을 환기하고 상대국 대통령과 교황까지 움직여 마추픽추 유물을 돌려받을 수 있었듯 우리도 모든 역량을 모아야 문화재 한 점을 환수할 수 있다. 환수된 문화재는 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는 자긍심을 주기 위해서라도 진정한 제자리 회복이 이뤄져야 하겠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발해 유물과 고구려 문화재가 이역만리의 다른 나라로 가는 일도 더 있어서는 안 되겠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창조자들이 만든,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 게스트 룸 투숙자 가방에서 새어나온 황금빛

그날, 아스파우가 여자 친구의 채근에 파일럿 백을 억지로 벌리자 틈 사이로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도구를 이용해 가방을 열어 보니 예수와 기독교 장식이 된 왕관이 나왔다. 왕관에는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 황금기를 개척한 유명 황제 파실리데스(Fasilides, 1603~1667)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파실리데스는 수도를 곤다르로 천도하면서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솔로몬 왕조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황제의 왕관이기에 국보급 문화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파우는 2019년 12월 이 왕관의 에티오피아 반환 결정이 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에티오피아 국보급 문화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 집이 에티오피아 문화유산의 밀수에 이용되다니? 나는 에티오피아 역사, 에티오피아 왕국에 대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내 개인적으로 이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왕관의 귀환이 결정된 후 아스파우는 수많은 언론과 인터뷰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왕관 밀수범의 이름과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또 밀수범이 왕관을 어떻게 확보해서 머나먼 네덜란드까지 통관이 가능했는지 반입 경로는 모른다고 답했다.

가방에서 왕관이 나온 그날 저녁, 근처 카페에서 아스파우는 문제의 가방 주인인 투숙객을 만났고, 왕관에 대해 언쟁을 벌였다. 투숙객은 “왕관은 이미 거래가 끝나 파리에서 넘겨주기로 되어 있다. 당신 아버지 집이 강도를 당했다면, 당신이 개입할 수 있지만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다”라며 아스파우에게 상관하지 말고 빠지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아스파우는 “지금 교회에서 유물을 훔쳐내는 사람은 누굽니까 우리 조상들이 그 교회에 섰고, 울며 매달리며 기도했고, 찬양했던 곳입니다. 누구나 경제적으로 더 잘 살고 싶지만 그래도 원칙은 있습니다. 나는 이 왕관을 우리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야 당신도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왕관을 보호하겠습니다”라며 왕관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고 돌려주지 않았다.

아스파우는 당시 왕관을 확보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에티오피아 정부에 반환할 수가 없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왕관 절도에는 정부 당국자가 공모자로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곳곳에서 들었고, 이를 넘겨줘 봐야 다시 도난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쿠데타 세력들이 에티오피아 민초에 널리 퍼져있는 교회를 해체하고, 교회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당시 실정이었다.

그는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왕관을 에티오피아가 아닌 네덜란드 정부에 넘겨주면 어떨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로 돌아가야 할 시기에 네덜란드 정부가 왕관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반환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우려되었다.

1332호 30면, 2023년 9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