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우리가 그리스의 오페라 가수로 알고 있는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1923년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국적을 바꾼 일이 없는 미국인이다. 마리아 칼라스의 부모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세대다보니 칼라스도 그리스인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 안나 소피아 세실리아 카로게로포울루> 라는 긴 이름으로 밖에서나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쉽게 부르기 위해 아버지가 발음편한 이름으로 바꾼 것이 <마리아 칼라스> 이다.
독일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바꿀 수 있게 되어 있다.
칼라스의 어머니가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처럼 몹시 극성스러웠나 보다. 딸이 동네나 초등학교에서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성악을 배우게 했다. 그녀의 성악공부는 그리스 아테네 음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마리아 칼라스가 1977년 빠리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54년이라는 짧은 생애에서도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가 작곡한 오페라 토스카(Tosca) 에만 51번이나 무대에 오를 정도로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1950년대 이후 몇 명 안 되는 오페라 소프라노 가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로 손꼽히고 있다.
그녀의 오페라 가수로서의 첫 무대는 1943년 아테네 오페라 음악원이었으며 1965년 7월 5일 영국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에서 가졌던 무대가 마지막이었으니 22년간의 무대 생활이었다.
그녀의 국제적인 명성은 1949년부터 시작되었다.
빈센초 벨리니(Bellini)의 작품 푸리타너<Pritaner>중에서 엘비라<Elvira> 역을 맡은 소프라노 가수가 다른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하게 되자 그녀를 대신해서 무대에 오른 것이 큰 성공을 보게 된 것이다.
오페라공연 때에는 주인공들의 갑작스러운 건강 또는 사고로 무대에 오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대체할 수 있는 가수들을 객석에 앉히고 있는데 유명한 <플라시도 도밍고>도 <프랑코 코렐리>를 대신해서 <아드리아나 룩브뢰어> 무대에 오르면서면서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의 이름이 도밍고로 알려졌지만 José Plácido Domingo Embil에서 볼 수 있듯이 도밍고가 아니고 엠빌(Embil)이 그의 본명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대역으로 올라선 이후부터 오페라 아리아를 포함해서 43편의 잦은 무대를 갖게 되는데, 거기까지 오는 데에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올라섰다기보다는 수많은 어려움의 고비들이 많았다.
28세의 나이 차이가 나는 이태리의 부호 메네기니(Meneghini)가 후원자로 뒷받침을 해주면서부터 칼라스는 음반과 오페라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세계적인 소프라노가수로 올라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의 억만장자인 아리스톨레스 오나시스(Onassis)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만들어 놓은 남편 메네기니에게 이혼을 신청하는 배신을 때린다.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동거하며 결혼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나시스가 케네디 미국대통령 부인이었던 <재클린>과 결혼하는 바람에 억만장자와의 사랑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오나시스의 배신에 크게 실망했던 칼라스는 그들의 결혼식 이후 일체의 매스컴에 나타나지 않으며 은둔생활로 지내다가 53세되던 1977년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마리아 칼라스가 오나시와 결혼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자기의 뒷바라지를 해주던 <메네기니>를 이혼으로 배신한 것에 따른 인과응보가 아니었을까 !
마리아 칼라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부른 가극들은 영원할 것이다.
2019년 12월 13일, 1150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