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광산생활 수기(3, 마지막 회)
이종우 (1971년 2월 10일 내독, 함부르크 거주)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1회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고향에서 볏짚 나를 자기 처를 향해 몹씨 염려하던 그의 푸념 한마디!
가을걷이 할 그 때는 특히 볏가락이 옷속으로 잘 스며든다. 따갑다.
추석 언저리인가! 그 무렵, 하임식당(맨 아래층)에서 저녁을 먹고, 각자 계단을 타고 2층 3층 그리고 4층으로 오르기에 바쁜데, 김XX동료(35-6세 정도) 가 첫 계단에 걸쳐 앉아 하는 걱정의 푸념이 “마누라 속옷 속으로 가락 들어갈라”, 농촌출신 아니고는 얼핏 귀에 들려오지 않는 의미의 말투다.
그러면서 뚫어져라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내게 “이선생! 원래 가을 볏가락이 옷 속으로 잘 파고들어 단단히 털지 않으면 무척 속이 따갑다오” 하며 그가 씨-익 웃을 때, 나도 그게 무슨 우스게 소린지 알아들었다. 치마가 아니고 발목이 고무줄로 좁혀진 바지를 입어야 한다며 구태여 설명을 선생님이 학생한테 일러주는 것처럼 차근히 말 하더이다. 모두들 파안대소.
‘가을걷이’이 때 생각나는 시가 있어 같이 곱씹어 본다.
홍시 두 개 / 천영희
낙엽이 우수수 쌓인 둔덕 아래
바람과 햇살이 살며시 머물다 가는
부모님 잠드신 곳자식들이 놓고 간 상석 위 홍시 두 개
산새들이 조잘대며 적막 쪼아 먹는 소리에
외로움 달래시겠지요억새풀 스치는 비탈길에서 뒤돌아보던
자식들 귀밑머리에도 희끗희끗 황혼이
내려안고 있답니다아버지 어머니 그립습니다.
야—가! 시방 뭬라하요?
우리가 처음 독일에 와서 항내에 들어가기 전 독어교육이 지상(Übertage)에서 4주간 인가 있었다.
작업고유번호(Marken Nummer)대기, 이름석자/ 생년월일/ 거주지 주소/등 말하기. 지상강당에서 아침부터 점심시간까지 주로 회화체 독일어를 배우고, 점심시간이 지나면 밖에 나가 시키는 대로 자재 모아 정리하기, 낡은 것 새 것 구분지어 재놓기, 주변환경 정리하면서 공구이름 외우기등.
회화 첫 머리에는 Du가 아닌 Sie 칭을 사용하는 문법으로 늘 익혀 배워 왔다. 가령,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나이는? 주소는 등등
어느 주말인가 Ostefeld 소재 유명 Discotek ‘Big Ben’에서 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오!케롤”, “다이아나” 등 음악소리에 맞춰 신나게 춤추며, 광산작업장을 훅 떠난 모두가 홀가분한 기분에 휩싸여 있고, 우리도 많은 독일 젊은이들 틈에 끼어 무르익은 연회석 같이 홍조를 띠며 고향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때론 작업장에서 경험한 일들로 맥을 잇기도 한다.
한편 약삭빠르게 독일어 배운다고 현지인들 중 만만한 젊은 여성을 택해 자리로 불러 초대형식으로 음료수 사주며 그 대가로 말도 걸고, 춤도 추기도 하며 독일생활로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작정한다.
어느 날 우리와 같이 앉았던, 지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홍XX동료- 합기도 6단인가 운동을 잘 해, 늘 인기가 있어 주말에는 자주 Big Ben에서 DJ가 일부러 저녁 21:00시쯤에 puase를 하고 홍씨가 이마로 Cola병을 깨도록 ‘쇼타임’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 Big Ben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은 대개가 그를 다 안다. 무서운 사람이란 걸…
그날따라 웬 처녀가 다가와 그이 옆에 앉으며 “wie alt bist du?”라 묻는다. 1-2초간 잠시 침묵…을 지키던 Mr. 홍이 우릴 쳐다보며, “야가 시방 뭬라 하요?” / 웃음 / “홍형한테 몇살이냐고 나이 묻잖아!”
“이-잉 그거”, “wie alt sind Sie?”,
“ 뭣 말이 그러냐 야! 제대로 물어 보지!!! ” 모두 파안대소ㅎㅎㅎ
“Ein und dreissig! Ein und dreissig!” 연거푸 그리고 아주 자신만만하게 당당하게 외치더라구.
크게 다치기 전에 이젠 탈출작전
누구나 항내작업을 한 사람이면 등 또는 몸 어느 구석인가에는 반드시 연파란 색으로 모두가 다 문신 아닌 문신을 했을 줄 믿는다.
땀범벅이 된 상체를 식히려고, 자주 윗도리를 벗어던진 경우가 많고, 천정에서 수시로 떨어지는 크고 작은 잡석이 상체를 할퀴고 지나가면 반드시 그곳엔 탄가루가 즉시 그 상처를 메꿔 준다. 몇 시간 지나야 몸을 물로 닦게 되니 이미 상처 속으로 잘 안착한 탄가루로 착색작업은 끝난다.
게다가 내몸의 완전무장상태로, Helm엔 전등을 달고, 등에는 배터리, 허리에는 물통(보통 3l, 크기)을 차고, 겨우 0,7m 높이밖에 안 되는 작업장 천정 밑에서 일을 하려면,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고개를 바로 들지도 못하고, 비스듬히 누운 채 20kg 이상 되는 철 Stempel
들썩거리며 천정 받히는 작업을 몇 시간이고 한다. 어설픈 자세로 일을 하다보면 모든 게 정확할 수가 없고 무거운 철 stempel을 받치다 보면 유압식 피스톨을 이용 상부로 쏴 올리는 순간 손가락이 천정과 Stemepl Kopf 사이에 끼면 손가락은 여지없이 잘라진다. 그런데 내 경우 Stempel Kopf에 손가락이 물릴 순간에 잽싸게 손을 뺏더니 작업장갑만 물려 있는게, 더운 여름 숨차서 헐떡이는 개 혓바닥 같이 덜렁 걸려 있더이다. 아찔했죠. 그 순간이.
내 가냘픈 체구에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의 무거운 자재들이 견디는 한도를 넘었다. 내가 한국서 해외개발 공사 신체검사 때 합격선인 57kg으로 겨우 합격한 사람이다.
지금도 그 때 항내에서 얻은 상처에는 푸르고 선명한 문신들이 여럿 남아 있다. 옛날 노비들 아마에 찍힌 흔적 못 지우듯이….
게다가 많은 장비들의 그 큰 소음! 몹시 날리는 탄가루에 앞이 보이질 않는 항내 작업장! 작업진도가 늦는다고 닦달하며 소리소리 지르는 Steiger와 작업선임 독일동료. 뭐라 하는지 도무지 들리지도 않고, 입으로 코로 밀려드는 땀 때문에 1분도 채 계속 일을 할 수가 없다. 몸을 잘 추수를 수가 없어 호흡곤란 증세 까지도 느껴진다.
서지도 길게 다리도 못 뻗는 그곳, 잠자리. 그들은 어찌 거기서 견뎠을까? 불현듯, 이게 바로 얘기만 듣던 유태인들의 지옥 바로 그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를 연상케 하고,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새삼스럽게 불쌍하기도 하지만, 그런 역경을 딛고 지금도 건재한 그 질긴 민족성에 경애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생각하니 내 모습이 이리 허약하단 말인가? 이 길이 내게 정녕 호강인가 불행인가 또 앞날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 나다. 어찌할가!!
내겐 위장 취업이었지?
파란곡절이 많은 Oberhausen에서 빨리 벋어나고 싶은 생각만이 머리에 꼭 찼다.
한편 애초 해외개발공사 취업신청서 학력난에 중졸이라 기재…. 이젠 할 수 없네. 학사증서를 내밀고 “독일대학에 진학하겠다”라고 변신하는 수밖에.
바로 광산통역인을 통해 Jacobi광산 Direktor와 맞대면 끝에 3년 광산노동계약 파기 및 그로부터 Freigabe를 받아, 함부르크 외사 Polizei(Innen)에 이주신고, 결국 체류허가를 받는다. 그 길로 여차여차 순서를 밟아 함부르크대학에 입학허가서를 제출하고 얼마 후 Zulassung을 받게 된다. 1972년 9월 가을학기부터다.
1973년 중반에 모 독일 Spedition 회사에서, 요즘 한국으로 귀국하는 간호사들의 이삿짐이 몇 건 들어왔는데, 그 Job을 전적으로 살려서 진행하고 싶다며 한국현지인을 찾는다는
소식을 친지로 부터 들었다. 바로 그 회사를 찾아가 그 일을 내가 맡아 전적으로 병원 기숙사마다 집요하게 광고를 하고 입소문을 통해, 북독지역에 광범위한 이삿짐 한국탁송안내를 해서 50여건을 2년간에 걸쳐 잘 해냈다. 그러는 사이 Spedition사로부터 신용을 얻어 그 건물 귀퉁에에 작은 개인 사무실까지 얻게 된다. 과거 항내작업하고 비교하면 지금 나는 천상에서 있는 것 같았다. 창공을 나는 듯 그 뿌듯함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던 순간들이다.
코트라 함부르크에서도 75/76/77초 까지 근무하며, 국제무역 등에 관한 기초지식을 얻게 되고 그로인해 지금의 LG상사(당시 반도상사) Frankfurt/M. 주재사무소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1981년말 경에 반도상사 본부 철강사업부로 아예 본사 발령을 내줄 터이니 한국으로 가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그걸 내가 수락할 수 없었던 것은, 다시 한국행은 꿈에도 그려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식구들, 아이들 교육문제, 아니면 가족과 별거생활 등 끔찍한 일이 닥쳐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거절하며 사표를 내고 Frankfurt를 떠나 다시 Hamburg로 와서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살았고, 지금은 Tee Beutel처럼 얄팍하고 오래 셀 것도 없는 연금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독일생활 53년을 거친 나를 1세대로 하고 이젠 3대까지 심었으니, 덕수 이씨(德水 李氏) 집안을 여기서 새롭게 유럽인류사에 걸맞은 새롭고 박력 있는 이씨 족보를 세울 수 있어 유럽진출이 더욱 뜻 깊고 행복한지 모른다.
대한민국 대통령님께 제언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제안 드립니다.
국내 5.18인사 및 그 대우하고, 조국으로부터 60년간 내팽개쳐진 파독광부간호사 대우랑 맞바꾸시면 어떻습니까?
대통령께서 밑지시나요? 인류사에 어떤 기발한 다른 수학계산 법이 없을까요? 저희들이 국가를 위해 더 확실하고 명백한 애국심을 발휘한 것 아닙니까? 조국의 재정을 거덜 내는 일을 저희는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탬이 됐으면 됐지요.
공적? 아무도 못하고 그들만이 했다는 ‘민주화’때문인가요? 단군이래, 개천한 이래 어느 때부터인가 그들 스스로가 늘 피해와 박해만 받은 집단처럼 자해하며 말만 꺼내면 ‘민주화’, 툭하면 이마에 붉은 띠 두르고 결사 항쟁하는 못된 버릇으로 호사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우린 지구반대편에 서서 자그마치 60여 년 동안 지켜봤습니다. 이젠 그만들 하슈!
차라리 국사 한 귀퉁이에 가냘프게 겨우 들러붙어 있는 광부간호사 실적 지워 버리시면 어떨까요.
1341호 14면, 2023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