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사는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분단으로부터 통일을 거쳐 오늘날까지의 독일을 조망해본다.
이를 위해 지면을 통해 독일의 분단, 분단의 고착화, 통일과정, 통일 후 사회통합과정을 6월 첫 주부터 연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자 주
1990년 독일은 40년 간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그러나 통일의 기쁨과 감격도 잠시 독일은 정치적 대변혁이 야기한 많은 과제들에 직면했다.
우선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이 된 만큼 동독지역의 정치, 경제, 행정 체제를 신속히 서독식으로 전환해 신연방주로 정착시키고, 40년 간 상이한 사회체제 속에서 살아온 동서독지역 주민의 사회 심리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여 내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 문제 외에도 독일은 40년 간 동독에서 시행된 사회주의통일당(SED, 이후 사통당으로 약칭)의 독재청산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었다. 통일 후 학계와 언론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사통당은 모든 권력을 장악해 억압적 정치제제를 구축했고, 사회 전반에 대한 감시로부터 체제비판 세력에 대한 탄압, 베를린 장벽과 동서독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한 동독인의 살상 등 수많은 정권 범죄를 자행했다. 사통당 정권도 붕괴하고 통일과 함께 구 동독지역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했지만 40년 간 축적된 이러한 독재의 유산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에 따라 통일 후 독일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치 과거청산과 더불어 사회주의 독재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그것이 남긴 어두운 유산을 청산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과거청산 작업은 크게 다섯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독일에서는 사통당 정권이 자행한 범죄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주요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사법청산이 시행되었다. 둘째, 동독 비밀정보 기관 국가안전부(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1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시행하고 있다. 국가안전부는 국가안보를 담당한 기관으로, 동독의 전 사회 영역을 감시하고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동독인을 다양한 방식으로 탄압함으로써 독재 체제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사통당 독재의 과거를 청산하는 데 있어 국가안전부는 집중적으로 조명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를 위해 독일은 통일 직후 이례적으로 국가안전부가 남긴 방대한 문서를 공개해 국가안전부가 자행한 불법 행위의 진상을 낱낱이 규명하고, 사통당 정권 범죄의 형사 소추, 피해자들의 복권과 보상, 공직자의 인력 검증 등 체제 불법 청산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셋째, 독일 의회 역시 과거청산에 적극 참여했다. 독일 연방 의회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의회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동독 사회주의 독재의 원인, 역사 및 결과를 조사했다. 이처럼 의회가 과거청산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적으로 나선 것은 독일 역사상 처음이었고, 의원 외의 독일인도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연방 의회 조사위원회의 활동은 과거청산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었다.
넷째, 비민주적인 사통당 정권 하에서 40여 년에 걸쳐 시행된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많은 동독인이 고통을 겪었다. 많은 이들이 부당한 구금, 납치, 고문, 살인의 희생자가 되었고, 대학진학이 좌절되었으며, 직장에서 해고 혹은 좌천되었다. 또한 본인의 의사와 달리 강제로 서독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부당하게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과 복권 역시 과거청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피해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상해를 보상하고, 정치적 재판에 의해 억울하게 범죄자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사법적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법적, 제도적 지원을 시행하고 있다.
다섯째, 통일 후 독일에서는 학계, 언론, 공공·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사통당 독재에 대한 연구 및 계몽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과거청산의 궁극적 목적은 과거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 독일에서는 공공 기관 뿐 아니라 많은 민간단체들이 사통당 독재의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교육, 문화 활동을 시행하고 있고, 이를 토대로 독일인의 민주주의 의식을 함양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사법청산의 기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사법청산을 시행한 독일 사법부는 형사 소추를 위 한 일련의 기준을 수립했다.
첫째, 행위 당시 유효했던 동독법에 따라 형사소 추가 가능한 경우에만 사법 처리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이미 1990 년 동서독이 통일 조약을 맺을 때 합의된 ‘형벌 불소급 원칙’으로, 동독 시 절에 자행된 범죄 행위가 당시 효력을 지닌 동독법에 따라 자유형,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을 선고할 수 없는 경우 형을 배제한다고 규정한 형법 시행법 315조와 형법 제2조를 토대로 했다.
이는 곧 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은 범죄행위시의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이 가능하고 나중에 만들어진 법률을 소급 적용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통일 후 사법 처리 대상에 오른 행위가 과거 동독 법규에 의거해 합법적이었다면 독일 연방법에 의해 처벌할 수 없었다.
둘째, 통일 조약에 의해 전 독일에 확대 적용되는 독일 연방 헌법이 행위 시법인 동독법보다 가벼운 처벌을 보장하는 경우 경한 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연방 헌법을 적용하기로 했다.
셋째,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법체계가 기본적으로 개인의 법질서에 대한 침해를 범죄 구성 여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사통당 정권 범죄의 사법 처리 에 있어서도 개인이 저지른 죄의 몫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기준 으로 삼았다.
이들은 법적 안전성과 법치 국가의 질서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지극히 타당한 원칙이지만 사통당 독재의 사법청산에는 제약이 되었다. 동독 형법 전서에는 반체제 세력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충분한 법규가 있었고,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법규가 아예 없거나 많은 예외 규정이 존재했다.
따라서 동독 법규를 우선으로 적용하다 보니 일련의 불법 행위에 대한 형사소추가 불가능했고, 기소된 정권 범죄의 주요 책임자들도 하나 같이 재판 과정에서 형벌 불소급 원칙을 내세워 무죄를 주장했다.
1197호 31면, 2020년 1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