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120년 전 탄생한 최초의 공식국가 “대한제국 애국가”(2)

1902년 1월 27일 자 대한제국 관보에 “대한제국 애국가”가 실렸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한제국은 이를 애국가로 공식 지정하고, 이어 악보를 인쇄하여 50여 개국에 선포, 발송하였다.

올해는 우리나리 최초의 애국가 “대한제국 애국가” 공식 지정 120년 되는 해로, 주독한국문화원은 7월 1일, 7월 2일 양일간 베를린과 할레(Halle)에서 “120년만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기념음악회를 개최한다.

교포신문사에서는 기념음악회를 앞두고, “대한제국 애국가”의 탄생과정과 작곡가 프란츠 폰 에커트(Franz von Eckert, 1852~1916), 그리고 그가 한국 음악에 끼진 영향 등을 4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지난호에서 이어집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로 통용되는 애국가는 1936년 안익태(安益泰, 1906~1965)가 작곡한 것으로,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의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현재의 애국가 이전 최초의 애국가는 시기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대한제국 시기에 탄생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과 1896년 독립협회 결성 이후 민간에서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많은 애국가들이 작사되었는데 약 10여 종에 이르렀으며, 어떤 곡조로 불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가사들이 독립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가 공포되었는데 국가에서 정식으로 애국가를 제정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이번 호에서는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폰 에커트(Franz von Eckert, 1852~1916)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한국 최초의 국가 작곡자이자 서양 음악 전파자 프란츠 폰 에커트(Franz von Eckert)

한국에 서양음악이 처음 전래된 시기는 언제일까? 막연하게 구한말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으나 구체적인 시기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서양음악이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공식적으로 1900년 대한제국 황실군악대가 설치된 때로 보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조롭게 군악대가 설치된 것은 아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일본군을 견제할 러시아군의 파병 요청 특사였던 ‘민영환’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서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를 본 후 고종에게 군악대 창설을 제안했고, 우여곡절 끝에 1900년 12월19일 대한제국 군악대가 설치됐다. 공식적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음악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군악대를 지휘할 군악대장으로는 당시 일본에서 활동중이었던 독일 음악가 ‘프란츠 폰 에커트’에게 맡기기로 하고 서울 주재 독일 영사 ‘하인리히 바이페르트(Heinrich Weipert)’에게 요청했다. 에커트는 이전(1883)에 이미 독일 함대 헤르타(Hertha)의 독일 해군 음악단 대표로 한차례 방한했었고 당시 일본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에커트가 황실군악대 교사로 오기까지의 사연은 지난호(1269호)에서 살펴본 바 있다).

하지만 에커트는 건강상의 이유로 1899년 독일로 돌아가 프로이센 왕립 악단의 단장으로 잠시 근무하였다. 건강이 양호해지자 1901년 2월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고 그해 4월5일 군악대 교사로 3년간 근무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입국 당시 에커트는 서양 음악을 교육하거나 50인조 군악대를 구성할 수 있는 분량의 악기를 함께 들여왔다. 이로써 비록 군악대이긴 하나 진정한 서양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탄생한 것은 물론,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서양음악이 전수되기 시작하였다.

프란츠 폰 에커트의 생애

프란츠 에커트는 1852년 프로이센 슐레지엔 주 발덴부르크(Waldenburg)의 노이로데(Neurode, Nowa Ruda)에서 법원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러 학교들을 다녔으며, 특히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브레슬라우(지금의 폴란드 브로츠와프)와 드레스덴의 예술학교들을 다녔다.

그 후 나이세(Neiße, 현재의 폴란드 니사(Nysa))에서 군악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빌헬름스하펜 지역에서 해군 근무했다. 그때 마침 독일의 해군에서는 일본 해군에 파견할 음악가를 찾고 있었고, 그 기회로 인해 1879년 에케르트는 도쿄에 도착하였다.

에커트가 일본에 도착했을 당시, 서양 음악은 일본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에커트는 다양한 서양 악기들을 일본에 전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서구식의 멜로디와 하모니들을 일본 음악계에 전해주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듬해 봄부터 에커트는 독일 군악의 많은 부분들을 일본 군악에 전해 주었다. 1883년부터 1886년까지 그는 일본의 교육성의 음악 분과를 위해, 관악과 타악 분야에서 일했다.

1888년 3월 에커트는 일본 황궁의 고전음악부를 위해서 일했는데, 그곳에서 일본의 공식 제례음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2년부터 1894년까지 그는 도야마의 군악대에서 독일 군악을 가르치는 교습소를 운영하였다. 그 동안 도쿄의 일본 황실 가족들을 위한 오케스트라를 만들기도 했다. 그때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일본의 초등학교를 위한 노래 음악책들을 편찬한 것이었다.

1899년 3월 31일 에커트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일본을 떠나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프로이센 왕립 악단의 단장으로 잠시 근무하였다.

대한제국에서의 활동

6월 14일에 대한제국군 육군 군악대 교사로 채용된 에커트는 한국 최초의 군악대 조직과 창설 작업에 착수해 왕실의 지원을 받아 악대 구성에 필요한 악기를 구입하는 한편 대원의 모집과 악기 다루는 훈련을 시켰고 이에 군악대는 에커트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불과 4개월 만에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게 되었다.

에커트가 조선에서 하게 될 일은, 사실은 일본에서 그가 했던 일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걸어닫고 은둔하고 있었던 대한제국은 서양의 음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에커트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그대로 살렸기 때문에 일본에서와는 다르게 큰 시행 착오 없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필요한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훈련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24명의 연주가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이 수를 거의 70명으로 늘렸다. 그들은 왕궁 내에서뿐만 아니라, 매주 목요일마다 파고다 공원에서도 연주를 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의 정부로 부터 정식 국가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1902년 7월 완료한 후 12월 고종으로부터 태극 3등급 훈장을 받게 된다. 이 대한제국의 국가는 1910년의 한일 합방으로 금지되기 전까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연주되었다.

그가 작곡한 대한제국의 국가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금지곡이 되었으나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곡을 계속해서 애국가로 불렀다. 또 그가 조직한 군악대는 창설된 후 황실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국과의 조약 체결이나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주를 했다.

당시 군악대의 연주에 대한 평가는 <런던타임스>에서 “한국의 군악대는 설립한 지 불과 몇 해 되지 않았으나 그 기술은 영국의 빅토리아 악대나 미국의 수사악대보다 못하지 않다”고 호평할 만큼 수준 이상의 연주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러일전쟁 직전 일본대리공사 하야시로부터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을 비교했을 때 누가 음악의 천재 기질이 있느냐”고 질문을 받은 러시아의 바울 공사는 “조선 사람은 동양의 제일 이라 일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본국 독일과의 연락이 힘들어지면서 연주단도 축소되었다. 게다가 에커트의 건강문제가 점차 악화되면서 활동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연주단을 지휘하기 힘들어진 그는 1916년 제1 플룻 연주자였던 ‘백우용’에게 지휘자 자리를 넘긴 후 은퇴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란츠 에커트는 오랫동안 고생했던 위암으로 1916년 8월 8일 현 서울인 경성부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명동성당에서 치러졌고 그가 직접 만든 연주단이 장례음악을 연주하였다. 순종 황제는 100원을 하사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에커트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한동안 잊혀져있던 그는 해방 이후 제3대 대한민국 해군 군악대장 남궁요열 해군 중령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일본 유학중 한국에 서양음악을 전수해준 에커트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남궁요열은 에케르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그의 공로를 기리는 행사도 기획해, 1949년 해군 군악대가 양화진 묘원에 안장된 에커트의 묘소에 헌화하고 묘소 앞에서 해방후 최초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연주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남궁요열은 에커트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수집했는데 그중에는 에케르트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최종적으로 완성하기 직전의 악보도 있었다고 하나, 6.25 전쟁으로 대다수의 귀중한 자료가 소실되고, 남은 것은 에커트의 초상 사진을 비롯해 몇 점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1270호 14면, 2022년 6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