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습득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재조명 – 2
독일어를 꾸준히 배우고 있는 분들이나 새로운 외국어 습득에 도전하시는 분들, 혹은 자녀들의 외국어 향상에 도움을 주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자 언어 습득에 대한 세간에 알려진 상식들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제 2외국어는 어려서 배울수록 더 잘 배운다?
몇 살부터 제2외국어를 배워야 하는가, 특히 학교 교육에서 언제부터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외국어 교육이 제도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가는 교육의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습자의 언어 구사 수준이 원어민에 도달해야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어릴 때부터 제 2외국어에 노출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여기서 제2외국어에 노출된다는 것은 단순한 노출이 아닌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노출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에 살면서 한국 사람하고 만 어울리고 한국 음식만을 먹고 한국어로 쓰여진 책만 읽고 한국 티브이 프로그램 및 유튜브만 본다면 독일어에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환경에서 제2외국어에 꾸준하게 노출되고 그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면 원어민과 같은 언어 사용자가 되겠지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제2외국어의 빠른 노출이 어린이에게 모국어, 즉 제1언어를 충분하게 발달시킬 기회를 박탈한다면 제2외국어의 빠른 노출은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외국어를 배우느라 모국어의 습득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생각보다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아이를 어려서부터 영어 유치원에 보내면 이중언어자가 된다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잘못되면 영어도 한국어도 인지능력에 상응하게 습득하지 못해 전반적인 학습에 문제를 일으키게 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상식이라 알고 있는 ‘언어는 어릴 때 배워야 더 빨리, 더 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고사하고) 배우고, 어른이 되면 언어를 배우기 힘들어진다’는 이 이론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간에 잘 알려진 가설인 ‘결정적 시기 가설 (critical period hypothesis)’은 1967년 레네버그 (Eric Lenneberg)가 처음으로 주장했는데 언어 습득은 생애에서 정해진 기간 내에 이루어져야 하고 이 정해진 시기에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언어 배우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은 언어 조기교육에 불을 지폈는데 학계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로 많은 연구들이 이 가설에 대해 앞다투어 의문을 제기했을 뿐 아니라 이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불완전한 학설이다.
먼저 이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두 가지에서 의견 불일치를 보이고 있는데 첫째, 언어의 “어떤 부분”에 대해 결정적 시기를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다. 어떤 학자는 ‘발음’에만 영향이 있다고 말하고, 어떤 학자는 ‘문법적 정확성’이라 주장하고, ‘대화 능력’에서 ‘언어 전반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하는 등 학자마다 상이한 의견을 제시한다.
둘째, ‘시기’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s)나 예민한 시기 (sensitive periods)가 언제인가 대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다. 6세가 결정적 시기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사춘기라고 주장한 학자도 있으며 이른 성인 시기인 스무 살 초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까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시기를 제시하면서 이것이 결정적 시기라 주장한다.
6세 이후부터 20세 초기까지를 언어 습득 능력이 사라지는 포인트로 잡는다는 것은 그 차이가 너무 크지 않은가. 6세에서 20세 초면 거의 15년이란 차이가 나는데 대체 어떤 연구들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엇갈린 주장들이 나왔을까. 뿐만 아니다. 마지막으로 왜 이런 시기가 존재할까 하는 신경학적 뒷받침에 대해서도 일치하지 않는 주장들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대체 이 시기의 실체는 무엇이며 언제 제 2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1. 어릴수록 무조건 좋다.
이 입장은 어린 나이에 제2외국어에 노출될수록 어른에 비해 무조건 여러 면에서 좋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발음에 대한 결과에서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25-30개 가량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특히 플리지 (Flege)라는 학자는 1995년에 240명의 이태리 학생을, 1999년에는 240명의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하여 원어민 같은 발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제2외국어를 배워야만 한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문법과 단어의 의미를 배우는 것에서도 그러하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존슨과 뉴포트가 46명의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5년간 연구를 하여 7세 이하에 영어를 배운 사람은 문법적으로 원어민에 가깝게 발전했고, 7세에서 15세에 영어를 접한 학습자는 문법적 정확성이 떨어졌으며, 17세 이후에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연구의 결과가 뒤죽박죽으로 나왔다. 즉 어떤 사람은 문법을 잘 배웠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결론을 냈다.
이 연구의 타당성에 대해 캘러만(Kellermann) 박사는 이의를 제기했고 그 후에 다른 연구자들이 같은 연구를 다시 재조명한 연구에서 학습자가 문법을 제대로 배우기 힘든 나이, 고정된 시기라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즉 논쟁의 논쟁을 거듭하면서 어릴수록 무조건 언어를 잘 배운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는 없다는 것에 학자들은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 나이들수록 언어를 더 잘 배운다.
그렇다면 성인 학습자가 언어를 더 잘 배우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은, 특히 한국인들은 어릴수록 언어를 잘 배운다는 위의 주장에 많이 노출되어 있어서 나이가 들어 언어를 잘 배운다는 명제가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주장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7살의 어린아이와 30살의 유학생이 독일어를 처음으로 배운다고 가정해 보자. 7살의 어린아이는 친구들과 교류를 통해 혹은 학교에서 하루에 한 개씩 두 개씩 새로운 단어를 듣고 사용하면서 독일어를 배워 나갈 것이다.
반면 30살의 유학생은 당장 독일에서 학교를 가야 하기에 하루에 100개 이상의 단어를 암기하며 한 달이면 꽤 어려운 단어집 하나를 끝내고 몇 개월 안에 독일 대학에 갈 수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다. 물론 독일어가 몇 개월에 완벽해질 수는 없지만 수개월 내에 괄목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학자들이 발표한 연구를 보면 발음 습득을 제외하고 (발음은 어려서 배우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어른이 아이들 보다 유리한 언어 습득의 분야가 밝혀진다. 즉 성인과 어린이 학습자가 둘 다 “교육기관에서” 언어를 배우고 있다는 전제하에 “짧은 연구 기간 동안”의 결과를 비교하면 성인이 어린이에 비해 언어 습득이 여러모로 빠르다.
즉 성인 학습자가 어린이 학습자보다 나은 것은 “단기간에 언어를 배우는 속도”이고 이것은 학교, 학원 등의 정규교육과정에서 교육을 받은 경우에만 해당된다. 필자처럼 집에서 독일어를 혼자 배우는 척하며 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사기꾼 성인 학습자에게는 슬프지만 해당되지 않는 결과이다.
3. 어릴수록 좋지만 특정 분야에서만 그러하다.
이러한 연구는 발음 분야에 가장 그 성과가 두드러진다고 위에 언급하였는데 어린 학습자가 그 외의 분야에서 우세한 점은 무엇이 있을까?
듣기, 말하기 혹은 간단한 회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어려서 배울수록 좋다는 연구결과들이 종종 발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발음 습득의 효과성이 나이하고만 관련되어 있을까이다. 또한 어린 학습자가 간단한 회화,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더 잘 해 낸다는 것도 회화가 어떤 주제나 문맥에서 이루어지는가에 집중해 보면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 낼 수 없다.
무엇이 간단한 회화인가, 무엇이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의미하는가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간단하게 옆 사람과 정치나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린 학습자가 성인학습자를 압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주제의 회화는 성인이 더 잘하고 어떤 주제의 회화는 어린이가 더 빨리 배운다면 회화 습득 전반에서 한쪽의 학습자가 더 우세하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즉 이 주장 역시 실효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언어 습득 능력이 우리의 바이오 프로그램과 연계되어 있다는 주장, 즉 나이가 들면 어떤 능력이 감소해서 더 이상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주장은 실소를 자아낸다. 사실 나의 독일어가 왜 이리 더디게 발전하느냐 하는 것은 나의 생체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나의 의지와 내가 얼마만큼 독일어 공부를 삶에서 우선순위로 놓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감소되는 암기, 듣기 (귀의 감각이 똑같이 예민할 수는 없으니), 발음 등의 능력들이 있다, 하지만 그 외에 성인이 어린 학습자를 능가하는 다른 능력들 (예를 들어 어려운 구문 만들기, 따라 하기, 상황분석 능력, 대인관계 능력 등)도 많기에 어린 학습자가 특정 분야에서 더 뛰어나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
4. 장기간 충분한 언어 입력량에 노출된다는 전제하에 어릴수록 좋다.
성인학습자와 어린 학습자가 ‘오랜 기간’ 그리고 ‘충분한 양의 외국어 입력이 이루어지는 환경’에서 학습한다고 가정할 때 어린 학습자가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위에 열거된 세 가지 주장에 비하여 옳다고 뒷받침될 증거가 충분히 나왔고 특별히 반대되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기에 현재까지는 가장 타당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성인 학습자는 학습 초기에 문법적 요소를 어린이 학습자에 비해 빠른 기간에 습득할 수 있다. 물론 성인 학습자가 외국어 공부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고 노출되었을 때에 한해서이다. 어린 학습자들 사이에서도 차이점이 발생하는데 나이가 많은 어린아이일수록 문법 발달이 빠르다. 물론 이것도 어린이 학습자가 외국어 공부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고 꾸준하게 외국어에 노출이 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결론은 즉 제 2외국어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노출된 학습자가 성인 학습자보다 장기전에서 볼 때 언어학습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데 이는 엄청난 양의 언어입력에 노출되는 환경에서 그러하다. 즉 인지적으로 성숙되어 있는 청소년과 성인들이 같은 시간과 교육방식에 노출된다면 청소년이 빠른 성취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릴 수 있다.
결국 언어학습의 가장 결정적 요소는 ‘나이가 어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랜 시간 언어에 노출되고 얼마나 많이 교육을 받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어려서 빨리 영어나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결정적 시기 이론은 어린이를 상대로 하는 외국어 사교육 확대,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키며 한국의 언어교육제도 자체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었다.
조기 언어 교육의 타당성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숱한 학문적 논란을 일으켰고 학계에서는 ‘뚜렷한 증거가 없음’으로 결론낸다. 물론 어린이가 타고난 언어 습득 능력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언어 학습의 능력은 나이별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고 ‘나이’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전체 학습시간’이 더 중요하다.
즉 독일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3년간 집에서 한국어만 쓰는 부모와 함께 살았다면 독일어를 못하게 되듯이 3살부터 영어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유치원에서 적응 못하고 수줍고 힘들어서 선생님과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유년을 보냈다면 그 영어 학습은 아이에게 상처만 남기게 된다. 잘못된 이론에 빠진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모국어를 충실히 배워야 할 나이에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조건 외국어를 어린 나이에 배우게 하기보다 어느 정도 지적으로 성숙되고 인지활동 의식적 조장과 통제가 가능한 청소년기에 시작해서 집중교육을 받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일 수도 있다. 언어는 꾸준히 오래 평생 배워야 하는 것이지 무조건 어려서 시작해야 한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은 헛된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있다.
다시 우리 독일에서의 삶으로 돌아와서 독일어와 애증관계에 싸여있는 나를 위시한 이 땅의 많은 성인 학습자들을 위한 희망의 외침을 남기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독일어를 잘 배울 수 있고 외국어 학습은 치매 방지에도 좋으니 매번 시간에 쫓기고 때로는 깜빡깜빡 망각과 싸워야 할지라도 평생 건강한 뇌를 지키고 매일 나아지는 우리의 독일어를 위해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배워나가자!
1310호 14면, 2023년 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