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 182

포르쉐 – 시대를 초월하는 브랜드 유산으로 ➁

우리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자동차의 패러다임 변화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 ‘화석연료로 움직이는 자동차’, ‘이동수단인 자동차’ 등 우리에게 익숙했던 개념이 빠르게 과거의 것으로 바뀌고 있다.

흔들림 없는 신념, 트렌드를 만나 새로운 도전을 하다

포르쉐가 전통에만 안주해온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말 포르쉐의 글로벌 판매량은 기존의 60%로 급락했고, 주요 시장인 미국 내 판매량은 2년 만에 2만 8,000대에서 7,800대로 곤두박질쳤다.

이 위기에 포르쉐는 당시 생산·구매책임자였던 비데킹(Dr. Wiedeking)을 전격적으로 CEO로 선임하고 생산의 합리화를 꾀했다. 비데킹은 도요타의 린 생산방식에 기반을 둔 컨베이어 시스템 등 기계식 작업공정을 도입하고 일본의 생산 전문가 집단을 고용해 생산효율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또한 아웃소싱을 확대하고 하청업체의 납품 단가를 60% 수준으로 내려 경쟁력 있는 비용구조를 확립했다.

이로써 카레라 모델을 조립하는 시간이 120시간에서 76시간으로 단축되었고, 2년 만에 생산비가 1억 DM 절감되었다. 이런 노력이 포르쉐가 ‘기계식 공정으로 제작되는 유일한 슈퍼카’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자동차 브랜드’로 기반을 구축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이러한 포르쉐의 획기적 도전으로 탄생한 차종이 바로 1993년과 2002년 각각 소개된 박스터(Boxster)와 카이엔(Cayenne)이다. 심각한 경영난을 겪던 포르쉐는 저가형 911 모델로 박스터를 출시했다.

박스터는 ‘일반 도로에서 운전할 수 있는 최초의 로드스터’라는 콘셉트로 포르쉐의 기존 스포츠카 지향성을 계승하되 가격은 911의 절반으로 낮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또한 엔진의 미드십(차체 중간에 위치) 배치로 핸들링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포르쉐가 지향하는

스포츠카의 새로운 가능성을 구현했다.

2002년 포르쉐가 내놓은 첫 SUV 카이엔은 출시 당시 팬들에게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스포츠카 메이커로서 전통을 버리고 돈벌이에 집중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이는 타협이 아닌 포르쉐 철학의 또 다른 완성이었다. 카이엔은 ‘가장 빠르고, 가장 편안한 차’를

지향하는 포르쉐가 독자적으로 해석한 SUV라고 할 수 있다.

종전의 SUV는 단순히 크고 힘이 센 자동차로 인식되었지만, 카이엔은 엔진의 반응성과 노면 접지력 극대화, 단단한 서스펜션 세팅, 낮은 시트포지션(운전석 높이)으로 SUV라고 믿기 힘든 주행감성을 구현해냈다. 포르쉐 전통이 해석해낸 신개념 SUV 카이엔은 생산 첫 해에만 4만 대가 판매되어 포르쉐 최다 판매 모델에 올랐고,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낸 선구적 모델이 되었다.

폭스바겐 인수 추진하다 폭스바겐 그룹에 역으로 편입되다

포르쉐는 기계식 생산방식을 도입해 확보한 높은 생산효율성과 박스터·카이엔의 글로벌 히트를 기반으로 해마다 판매량과 수익률을 경신했다. 쾌속 성장을 거듭하던 2005년, 혁신을 주도해온 포르쉐 CEO 비데킹은 폭스바겐(VW)그룹 인수 계획을 공개했다. 향후 7년

간 지속된 포르쉐와 VW의 치열한 상호인수라는 혈전을 이해하려면 두 기업을 소유한 포르쉐 가문과 피에히(Piëch) 가문의 관계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포르쉐 박사의 ‘성을 이어받은’ 포르쉐 가문과 ‘성을 이어받지 못한’ 외손자 피에히 가문이 포르쉐와 VW의 실질적 소유주였다. 포르쉐 경영권을 놓고 두 가문이 오랜 기간 갈등을 빚어오다 1972년 두 가문 모두 포르쉐 경영에 참여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포르쉐는 에른스트 푸어만을 필두로 전문 CEO 경영을 시작했고, 1992년 비데킹에 이르러 비약적인 성장을 일궈냈다.

한편 VW 경영자로는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 피에히(Dr. Ferdinand Piëch)가 부상했다. 그는 포르쉐의 최고 경주차 917 모델을 개발했지만 독단적이고 가족과 알력이 심해 포르쉐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아우디로 자리를 옮겨 직렬 5기통 TDI엔진, 콰트로,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 등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였다. 또 1993년 VW 회장으로 취임해 플랫폼 모듈화 전략(MQB),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해 내실을 다지고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를 인수함으로써 외연 확장을 이끌기도 했다.

비데킹과 피에히의 싸움으로 대변되는 포르쉐 가문과 피에히 가문의 VW 인수전은 포르쉐가 먼저 2005년 VW 지분을 18% 인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2007년 VW 사유화를 막기 위해 20% 이상 의결권을 허용하지 않는 소위 ‘폭스바겐법’이 폐지되자 포르쉐는 지분율을 51%까지 끌어올렸고 2009년까지 75%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포르쉐보다 자산규모가 15배나 더 큰 VW그룹 인수가 현실화 되는듯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쳐오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포르쉐는 판매량 급감, 막대한 주식투자 손실, VW 지분 인수 과정에서 급증한 부채 100억 유로 등 삼중고를 겪으며 순식간에 도산 위기에 봉착했다. 포르쉐는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독일 정부와 대주주 카타르 투자청에 도움을 청하지만 부정적이었고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VW이 포르쉐 인수를 전격적으로 제안했고, 대안이 없었던 포르쉐는 역으로 폭스바겐 그룹 열 번째 브랜드로 편입되었다. 이후 포르쉐는 독립 브랜드가 아닌 VW그룹 산하브랜드로 그동안 지켜온 고유 정체성에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VW그룹의 의결권의 52.2%를 창업자 포르쉐의 외손자이며 VW그룹의 회장을 지낸 피에히 가문이 회사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큰 틀에서 보면 포르쉐 가문의 전통이 VW그룹에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포르쉐는 창립자의 정신과 기술을 전통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이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해왔다. 포르쉐 헤리티지는 ‘가장 빠르고 가장 편안한 스포츠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고 911, 박스터, 카이엔 같은 획기적인 모델을 세상에 내놓는 원동력이 되었다.

1357호 29면, 2024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