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손병원

어디서 사나 인생이다. 내가 독일교민이 된지 어언 43년이 흘렀다. 파독 광부 간호사들은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크는 모습이 항상 예쁘고 귀여운 손자에게 주는 할 배 할 매의 심정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을 것이다. 내가 살면서 마지막으로 주는 핏줄사랑이기에 손자사랑이 더욱 각별해진다.

손자자랑은 돈 내고 해야 한다는 말이 맞다. 유치원에서는 무슨 행사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수고했다고 작은 봉지의 Haribo 사탕을 준다. 아이들은 일찍 받으려 서로 밀고 당긴다. 손자 놈은 저 뒤에서 지켜만 본다. 나중에 왜 그랬냐며 물으니 늦게 받아 오래 먹으려고 그랬단다. 4살 때 수영장 물속에서 3번 몸 돌리기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뜀틀에서 공중회전으로 입수하는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건 무슨 그림이냐 물으면 이런 것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자기가 만들었단다. 올 해 초등학교 들어갈 놈치고 하, 이놈이 뭔가 꿈꾸는 게 있구나. 갈수록 기특해진다.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사랑의 중요성 사랑의 힘을 잘 정리해 놓았다. 사랑 중에 자식사랑은 가장 자랑스러운 핏줄사랑이다. 사랑은 늦게 올수록 격렬해 진다. 핏줄사랑은 세상 변화나 그 어느 사회적 법칙에도 구애 받지 않는다. 팔이 안으로 굽지 바깥으로 굽나. 더욱이 내 몸이 알게 모르게 약해져 가니 내리사랑이 커져만 간다.

맹자에 나오는 데 – 한 노인이 숨을 거두면서 세 아들에게 유언했다. 소 17마리가 내 전 재산인데 큰 아들은 그 1/2을, 둘째는 1/3을, 막내는 1/9을 가져 잘 키우도록 해라. 장례를 잘 치르고 유언대로 소를 나누려니 계산이 안 된다. 큰 아들 몫인 17÷2= 8.5마리이니 잘 키우라는 말이 되질 않고 둘째 17÷3= 5.66… 셋째는 17÷9=1.88…

그래서 마을 어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하니 해결책이 나왔다. 자신의 소 한 마리를 보태어 18마리로 해서 큰 아들에게 9마리. 둘째에게 6마리 막내는 2 마리를 주었는데 오히려 한 마리가 남았다. 남은 한 마리는 내 것이니까 도로 가져가겠네. 노인은 지혜로 살아야 한다.

지혜는 정이 따스함이요 지식은 차가운 정보이다. 늙어도 부지런히 공부해서 안목을 키워야 한다. 어느 왕이 자신을 과신하기 위해 화상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첫 화상이 정성 들여 그림을 그려 올렸다. 자기 모습을 본 왕이 크게 화내며 그 화상을 벌했다. 왕은 키가 작고 등이 굽었으며 한 쪽 다리가 절름발이였다. 두 번째로 불려간 화상은 사정을 알고 딴에는 열심히 그려 왕에게 바치니 왕이 노발대발하며 화상을 벌했다. 훤칠한 키에 빳빳한 자세로 서있는 왕의 모습이었다.

세 번째로 불려간 화상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고민하다가 마을 어른을 찾아가 지혜를 빌었다. 화상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림을 바치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그를 후대했다. 전쟁을 좋아하는 왕의 이미지에 걸맞게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말을 타고 몸을 움 추렸으니 키가 작은지 모르고 등이 굽어도 알지 못하고 절름발이 다리는 저쪽이니 커버가 된 셈이다.

인생 삶에 대해 많은 이들의 깨우침이 있지만 나는 푸시킨의 싯귀를 좋아하여 가슴에 와 닿는 게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픔의 날은 참고 견디면 멀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려니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

옛날 장터에서는 푸시킨의 저 시를 까만 비로도(Velvet)에 오색 실로 바느질하여 많이 팔고는 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내가 첫 수술 받을 때 자청하여 실험대상으로 임했다. 배꼽에 카메라 넣고 수술하기이다. 이런 병에 고생하는 뒤 사람들을 위해 정의감이 발동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신 시술 개발이 미숙한 탓에 그런지 아직도 그 부분에 내가 생고생을 하고 있다. 그 비슷한 시기에 종래의 수술법으로 수술 받은 사람은 진작 멀쩡하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옛 시 한편으로 위로해 달랠 수 있으니,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리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을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전원생활의 평화로움과 질박한 삶을 즐긴다. 왜 사냐건 웃지요/ 그저 웃어넘긴다. 함의된 표현이 정겹다.

나는 특정종교를 믿지 않기에 현실에 큰 무게를 둔다. 인간을 서로 사랑하고 위하는 인간애의 바탕 감히 박애정신이라 하겠다. 인간애로 가는 세상이라면 지구는 계속 돌만하다. 천국 천당은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 가는 곳 아닌가? 그렇다면 현실세계의 생활도 엄중해야 된다. 이 땅 또한 신의 세계의 일부로 여긴다. 사는 일에 진 놈이 천국에서는 편할까?

아는 것만 목적으로 하고 행하지 않으면 죄이다. 살다가 죽으면 끝이라면 생전의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선 악의 구별이 필요치 않다. 불교의 환생은 전생에 관한 결과의 책임을 묻는다. 다시 태어나는 게 마냥 좋은 게 아니다. 그래서 인생은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 불교는 심판자가 아닌 자업자득으로 내세를 결정한다. 깨달음은 나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하는 자비로 나타나야 한다.

구약은 경배 받는 이야기 조화의 발자취는 없다. 예수의 율법은 인간중심의 사랑이다. 예수 이전의 낡은 율법은 율법을 하나님 위치에 놓고 절대화함으로써 그 형식이 인간구속 죄인 시하며 인성을 무시한다. 인간이 복제품이면 완제품도 알 수 있다. 예수의 신약인데 바울의 말이 더 많다. 내가 근본이기에 신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참다운 나를 깨달음이 구원이다. 원죄는 인간의 영적 불균형과 미숙함이다.

영적 부족함을 깨우치기 위해 불교는 윤회하여 전생을 통해 더 높은 영적 단계로 키울 것을 가르친다. 전생의 결과로 운명으로 산다. 사실증명이 불편함이지 정신에너지를 과학으로 계산하지 못한다. 여기에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다윈은 육체적 진화만 얘기했지 영적 얘기는 없다. 물질이 물질 아닌 것과 같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내가 막혀 버린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나는 독일에 오기 전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에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채탄 작업 중 사고가 나면 큰일이다. 몽달귀신이 되기는 싫다. 지하노동의 두려움에 앞서 찾아간 것이다.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벽을 돌아 39개의 불상이 살아있듯이 조각되어있다. 그 당시 경내에는 나 혼자 뿐이었는데 내가 무엇에 홀린 듯 1시간가량 머물렀다. 천 년의 묵언 앞에 내가 교통하고자 했으나 역 부족이었다. 산기슭을 내려오면서 느낀 게 하나 있었으니 내 몸 속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네가 더 큰 부처가 될 수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 확연히 구별된다.

오로지 유일신이라면 사람과 관계없는 목성이나 은하수는 왜 있나. 어쨌거나 믿어도 제 하기 나름이다. 양심은 없고 신앙만 깊어서 쓰나. 예수 부처 위해 믿나, 제 잘되라고 믿는 모습이 너무 보인다. 살아 복 받고 죽어선 천국이라? 종교의 자유는 믿지 않는 자유도 포함된다. 세상은 다양성에 있다. 선행으로 대접받겠지 – 위선이다. 불교는 인연의 법칙에 의해 항상 변하니 늘 같은 게 아니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한다.

믿음이 깊으면 그게 전부인줄 알고 교만해진다. 독선이다. 사람인 이상 겸손으로 낮춰져야 한다. 더 안다고 해서 앞선 것도 아니다. 어떤 연유로 한 세상을 살던 간에 서로를 위해 한 발자국씩만 양보하며 새로워지자. 그리하여 세상은 더 커지고 살만한 아이들의 세상이 된다.

2020년 6월 19일, 1175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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