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17)

고려 불화 이야기: 일본 국보 30점, 한국 국보 단 1점,

고려 불화는 전 세계 160여 점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단 20

독창적이고 위대한 고려의 문화유산 중에 ‘고려 불화’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불화 중 「수월관음도」는 동양의 모나리자로 평가받곤 하지만 고려 불화의 제작 시기와 규모, 높은 예술성을 고려하면 모나리자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다다른 우리의 자랑스러운 미술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고려 불화는 전 세계에 160여 점이 남아 있다. 그중 한국에는 「오백나한도」를 포함해 20점만 있을 뿐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 10여 점이 있고 일본에는 무려 130여 점이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불화의 대부분도 삼성미술관 리움과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등에서 구입해 가져온 것들이다. 사실 고려 불화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일본 야마토분카칸에서 고려 불화 52점이 전시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 국내에는 고려 불화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고려 불화는 1350년대부터 50여 년간 집중되었던 왜구의 침략과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부분이 약탈되었다. 그 결과 발생지인 한국보다 일본에 훨씬 더 많은 수의 고려 불화가 있게 된 것이다. 일본 정부가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한국 문화재 112건 중에 30점이 고려의 불화지만, 한국 정부가 지정한 문화재 중 고려 불화는 1984년 국보 제218호에 지정된 「아미타삼존도」 단 한 건이 전부다. 이 또한 리움미술관

이 구입해 보관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려 불화 연구자들은 한국보다 일본에 가야만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려 불화는 종교를 주제로 한 성화 중에 최고로 손꼽힌다.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성화보다 300여 년이란 시간에서 앞서 있고, 종교적 상상력과 섬세한 예술적 구현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그림의 바탕이 되는 비단의 직조나 재료가 되는 천연염료의 제조 등에서도 당대 최고의 기술력이 집약된 종합예술품이라 할 만하다.

최대 규모의 흥천사 고려 불화는 어떻게 일본으로 갔나?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

일본 나고야성 박물관을 전시장 중앙에 「수월관음도」가 자리 잡고 있다.

「수월관음도」의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양류관음상(복제), 제작 연도 1310년. 가가미신사 소장. 진품은 현재 규슈 가라쓰(唐津)시의 가가미신사에 있으며 나고야성 박물관에는 복제품이 있다. 진품 양류관음상(일명 수월관음도)은 고려 왕비의 소원으로 궁정 화원에서 제작한 고려 불화의 걸작품. 그림 하단의 중앙부에 있는 묵서명을 보면 고려에서 제작된 후, 곧바로 일본에 전해져 남북조시대 말인 1391년 승려 료켄에 의해 가가미신사에 봉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방송대 이영 교수가 쓴 이 논문에는 고려 최대 규모의 흥천사 불화는 1357년 9월 개성흥천사에 침구(침입하여 노략질함)한 왜구가 충선왕 부부의 초상화와 함께 약탈했다는 내용의 논문, 「가라쓰 가가미신사 소재의 고려 수월관음도의 유래」가 있다.

또한 이 논문에는 “『고려사 제39권, 공민왕 6년(1357) 9월 무술일(26일)에 있었던 ‘왜적이 승천부의 훙천사에 들어와 충선왕과 한국공주(계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가져갔다’라는 기록에 주목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영 교수는 외교적인 이유로 전래, 즉 선의 취득의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단정한다. 이유는 불교를 국교로 한 고려 왕조가 왕실과 깊이 관련된 초대형 수월관음도」를 일본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357년 9월 26일 개성 흥천사에 침구한 왜구들이 최대 규모의 ‘고려 청동반자(靑銅飯子)’와 ‘감지금자묘법연화경(甘旨金字妙法蓮華經)’ 등을 약탈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강조한다. 청동반자는 지금 대마도 다구쓰다마신사에 소장되어 있으며,『묘법연화경』은 나베시마 호코카이에 소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세로 4.19미터, 가로 2.54미터나 되는 최대 규모의 「수월관음도」는 누가 제작했을까? 제작 시기인 1310년은 고려 26대 왕 충선왕 복위 2년으로 당시 수월관음도」를 조성한 왕비는 숙비 김씨이다. 숙비는 당시 맞수였던 순비 허씨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궁중 화원 8명에게 명해 그해 5월에 불화를 완성한다.

이렇게 조성된 「수월관음도」는 고려 왕실의 원찰인 승천부(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의 흥천사에 봉안되었다. 흥천사는 당시 원나라 황실과 고려 왕실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충선왕과 한국공주(원 세조 쿠빌라이의 증손녀)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던 곳이다.

문화재의 안내문은 일방적 주장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야

일본 정부는 1971년 6월 22일 「수월관음도」를 중요문화재로 지정하면서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가가미신사에 소장되기 전최종 취득자인 료켄이 기증한 것으로 마무리했을 뿐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 보면 다른 29점의 일본 문화재지정 고려 불화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과거 내력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어쩌다 우리의 불화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는지 그 ‘취득 경위 조사’가 더욱 절실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1263호 30면, 2022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