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14)

사상 첫 문화재 구출 부대 ‘모뉴먼츠 맨’ ➁

■ 소금 광산에서 발견한 노다지⋯ 나치의 작품 보관소

나치의 가장 유명한 거대 약탈 예술품 보관소로 오스트리아 알타우제(Altaussee) 소금 광산을 들 수 있다. 광산 터널 길이만 64킬로미터에 이르는 미로 같은 소금 광산에서 그림 6577점, 조각 137점, 공예품 484상자를 비롯해 도서관 장서, 가구와 동전, 무기 등이 발견되었다. 벨기에 브루게에 있는 성모교회에서 강탈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조각 ‘브루게의 성모자상(Madonna and child of Bruges)’도 여기에서 나왔다.

미켈란젤로가 1501년~1502년 대리석에 조각한 이 작품은 1504년 벨기에에 도착한 이후 두 번이나 옮겨 다녔다. 미켈란젤로 생전에 유일하게 이탈리아를 떠난 작품으로, 브루게의 부유한 포목 도매상이 4000플로린에 구입해 벨기에로 들여왔다.

이 석상은 1749년 프랑스 혁명가들이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을 정복한 이후 파리로 가져갔다가 또 다른 대규모 문화재와 예술품 약탈 주범인 나폴레옹이 1815년 워털루 전쟁에 패배하면서 벨기에로 돌아왔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퇴각하던 독일 병사들이 이 석상을 매트리스에 싸서 적십자 차량에 싣고 독일로 반출했으나 1년 뒤 알타우제 소금 광산에서 발견된 뒤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또 벨기에 국보와 마찬가지인 겐트의 세인트 바봉(St. Bavo) 성당이 약탈당한 유명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형제의 ‘겐트 제단화(Ghent Altarpiece)’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나치는 네덜란드와 벨기에 예술도 독일 기원의 문화로 여겨 회복, 즉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 ‘화가의 아틀리에’ 진짜 주인은 누구?

히틀러가 가장 욕심을 부렸던 페르메이르의 1668년경 작품 ‘천문학자’와 1655년의 작품 ‘화가의 아틀리에(The Art of Painting)’도 역시 알타우제 소금 광산에서 나왔다. ‘화가의 아틀리에’는 히틀러가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열었던 전시회 ‘국민의 예술(Kunst dem Volk)’ 도록의 표지를 장식한 작품이다.

모뉴먼츠 맨이 되찾은 ‘화가의 아틀리에’가 미국 이동 대상으로 선정되자 MFAA 오스트리아 지휘관인 앤드루 리치(Andrew Ritchie)가 미군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작품을 독일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직접 운반했다. 그는 이 작품을 기차로 운반할 때 그림을 들고 열차 침대칸에 들어가 안에서 잠가버렸다.

페르메이르의 자화상으로 추측되는 ‘화가의 아틀리에’는 히틀러가 1940년 11월 개인 큐레이터 한스 포제를 통해 오스트리아 귀족 야로미르 체르닌(Jaromir Czernin) 백작에게서 당시 100만 라이히스마르크(350만 유로 상당)에 샀다. 전쟁 후, 이 작품은 체르닌 가문이 아닌 오스트리아 정부로 반환되면서 회복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화가의 아틀리에’의 원래 소유주인 체르닌 가문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서한을 보내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작품의 오늘날 가격은 1억 4600만 달러에 이른다고 체르닌 가문의 변호사 알렉산더 타이스(Alexander Theiss)가 주장한다. 타이스 변호사는 1940년 체르닌 백작은 부인이 유대계여서 가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팔았다며 “가족들이 그림을 넘겨주지 않으면 끔찍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화록도 있다”라고 강조했다. 종전 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화가의 아틀리에’는 체르닌 가문에 반환되지 않고 국가 소유로 오스트리아 대표 미술관인 빈 미술사 박물관에 걸려 있다.

타이스는 문제의 작품 반환과 관련해 “오스트리아 정부가 1960년대와는 달리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진행할 것으로 믿는다”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타이스는 히틀러가 구상한 총통미술관에 걸어두기 위해 이 작품을 합법적으로 구매했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 정부가 과거 반환 요청을 기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하여 오스트리아 문화예술부 대변인은 “출처조사위원회가 그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화가의 아틀리에’ 반환 요청에 대해 “가문이 자발적으로 팔았다”라는 이유로 몇 차례 거부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정부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 ∼1944)의 대작을 포함해 1만여 점을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 후손들에게 돌려준 바 있다.

■ 유럽, 지중해, 극동에서도 활동 ⋯ 500만 점 이상 반환

MFAA는 독일 남부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가구와 보석 등과 함께 6000점 이상의 그림을 발견했고, 1945년 4월 독일 중부 산악지대인 메르커스(Merkers) 소금 광산에서는 예술품을 담은 상자 수천 개와 대량의 금괴(2017년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유로 상당)도 찾아냈다.

이곳에서는 특히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개인 소지품과 금니 등이 무더기로 나와 그 비참함을 더했다. 나치가 예술품을 숨기는 창고로 이용한 소금 광산은 온도와 습도가 자동으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미생물의 공격을 막는 천연 저장고였다.

연합군이 훼손된 기념물이나 예술품을 발견하면, MFAA 요원들이 훼손 정도를 평가하고, 시간을 들여 복구 작업을 펼쳤다. 그렇다고 이들이 안전지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연합군 정규군이 들어가기 전에 이들이 먼저 최전방에 들어가 기념물, 성화, 작품들을 보호하고 구조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퇴각하던 나치에 의해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합국 13개국 출신 345명의 남성과 여성이 참여한 MFAA는 기념물, 예술품, 기록물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나치가 부유한 유대인, 미술관, 대학, 종교기관 등에서 약탈한 500만 점 이상을 소금 광산과 창고 등에서 찾아내 합법적 소유자나 국가에 돌려주었다.

MFAA는 미 국무부가 임무와 기능을 이어받으면서 1946년 6월 해산되었다. 이들 가운데 60명은 전후 6년 동안 나치가 숨긴 것을 찾는 예술품 전문 탐정으로 활동했다.

1293호 30면, 2022년 1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