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15)

사상 첫 문화재 구출 부대 ‘모뉴먼츠 맨’ ➂

■ 유일한 장교 항명사건, ‘비스바덴 마니페스토’

견물생심일까, 전승국 미국도 문화재 약탈 유혹에 빠진 적이 있다.

1945년 미군의 비스바덴 수집품 저장소를 방문한 해리 A. 맥브라이드(Harry A. McBride) 소령은 그 시설이 열악해 작품들이 훼손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 대통령에게 서한으로 보고했다. 되찾아 온 예술품을 둔 건물 복도에는 축축한 군용 담요가 깔려 있었다. 이는 작품을 회수한 MFAA 요원들이 작품 보존에 필요한 습기를 제공하기 위해 취한 임시방편이었다.

그러나 작품의 안전을 위해 베를린의 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202점을 미국에 보내는 것이 맥브라이드의 계획이었다. 물론 반환 기일은 없었다. 독일의 자랑거리인 카이저 프리드리히 미술관과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마네, 뒤러, 루벤스 등의 명작과 이집트와 이슬람예술품과 문화재 등이 이동 대상이었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1490년경 작품 ‘비너스(Venus)’도 미국으로 갔다. 미국으로 간 비너스의 자세는 보티첼리의 1485년경의 작품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브라이드의 계획을 승인한 것은 나치 약탈 행위나 다름없다는 비난이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작품들을 미국으로 실어 나르는 임무를 맡은 MFAA 소속 대위 월터 파머(Walter Farmer) 비스바덴 중앙수집품 저장소 감독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지금 명령을 받은 것은 독일이 그랬던 것과 같은 전쟁 범죄”라고 하소연했다.

그해 11월 7일 팔머 대위는 동료 32명의 모뉴먼츠 맨들과 함께 ‘비스바덴 마니페스토(Wiesbaden Manifesto)’로 알려진 항의 성명을 동봉해서 보냈다. 비스바덴 마니페스토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군 장교들이 행한 유일한 집단항의라고 모뉴먼츠 맨 재단이 월터 파머 편에서 밝히고 있다. 비스바덴 마니페스토는 아무리 전리품이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가져간다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취지다.

그런데도 그림들은 대서양을 건너 1945년 12월 6일 미국에 도착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예술품들은 3년 동안 뉴욕, 시카고, LA 등에서 순회 전시되다가 결국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1949년 봄 독일로 돌려보냈다. 작품을 반환하기 전에 미국 13 개 도시 미술관 14곳에서 ‘베를린 미술관에서 온 명작’ 순회 전시회가 열렸다.

순회 전시 기간에 미국 육군이 작품들을 운반하고 지켰다. 당시 미군은 로마의 개선장군이 그랬듯이, 전승국의 전리품을 군사작전처럼 효율적으로 전시해 구경거리로 삼았다. 관람객은 700만이었고, 입장료 수익은 19만 달러였다고 <스미스소니언협회 매거진>이 밝혔다.

■ ‘ 이탈리아의 자존심’, 우피치 명작을 지켜라

전쟁이 2년째 접어들던 1942년, 이탈리아는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 앞서1938년 5월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히틀러를 데리고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이탈리아 문화의 자존심인 피렌체 우피치(Uffizi) 미술관을 찾았다. 히틀러는 전시실마다 들러 한참 작품을 보았다. 그 어떤 제안도 없었지만, 전쟁 시작과 함께 명작들은 대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여하기 수일 전인 1940년 6월 16일, 피렌체 미술관 총관장 조반니 포지(Giovanni Poggi, 1880~1961)는 이미 세워둔 계획에 따라 문화재와 예술품 보호 작전을 시작했다.

1940년 6월 28일까지 비밀리에 미리 상자에 담아두었던 유명 명작과 훼손되기 쉬운 걸작들을 북서쪽 외곽 작은 마을 ‘포조 아 카이아노(Poggio a Caiano)’의 메디치 저택으로 대피시켰다. 그림 550점과 고대 대리석 조각상인 ‘메디치의 비너스(Venus de Medici)’ 등 조각 11점이 이동했다.

다른 미술관과 교회 등에 있던 작품들은 분산해서 보관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처럼 너무 크거나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는 예술품은 그 자리에서 벽돌로 고치처럼 둘러싸 공습 파편이나 건물 붕괴에서 보호하는 방법을 택했다.

연합군의 공습이 너무나 위협적이어서 피렌체 미술관 당국은 다시 한 번 중요한 작품이 포격 받지 않을 시골에 있는 성과 마을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대피 작품이 1만 1139점으로 한곳에 숨기기에는 너무 많아 38곳으로 나누었지만, 전체를 관리하기가 어려워졌다. 일부는 나치 독일군에 발각되어 도난당했다.

피렌체에서 20킬로미터쯤 남쪽에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몬테구포니(Montegufoni) 성이 예술품의 은신처 중 한 곳으로 정해졌다1.9 42년 11월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국립 바르젤로 미술관, 팔라티나 미술관, 산 마르코 수도원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나온 대작 260여 점이 몬테구포니 성으로 향했다.

이탈리아의 자유분방한 수도사이자 화가 ‘아버지’ 리피(Fra Filippo Lippi 1406~1469)의 ‘성모 영보(Dettagli dell’ Autorizzazione)’,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1494)의 ‘동방박사의 경배)Adorazione dei Magi_’,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_의 제단화 ‘옥좌의 성모(Maest di Ognissanti)’, ‘작은 술통’이란 별명을 가진 산드로 보티첼리의 1482년작 ‘봄)Primavera_’ 등이 몬테구포니 성으로 들어갔다. 성에는 이런 명작뿐 아니라 겁에 질리고 집이 없어진 피난민들로 혼란스러웠다.

1294호 30면, 2022년 1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