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80)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유산을 매 주 연재한 바 있다.
2023년에는 2022년 기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신청된 8곳과 신청 후 자진 탈퇴, 또는 유네스코에 의해 등재 거부된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실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살고 싶은 도시로 손꼽히는 하이델베르크.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 사람들은 아마도 모두가 이곳 하이델베르크를 한 번 이상 방문하였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도시에는 아름다운 고성과 강 그리고 자유로운 도시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고성에는 독일과 유럽이 간직한 종교와 전쟁에 관한 역사가, 대학에는 자유로운 사색과 자치의 기억이, 그리고 정갈한 구시가지에는 유럽의 활기와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는 여유로움이 있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하이델베르크는 교황 우르반 6세의 승인을 받아 폴란드의 프라하 대학과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에 이어 1386년 세 번째로 설립된 대학이자 독일 최초의 대학인 하이델베르크대학이 있으며, 독일에서도 아름다운 중세의 고성으로도 유명하다.

하이델베르크는 종교개혁의 첫 기치를 내건 도시라는 점 이외에도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침략하던 1815년경 러시아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 그리고 프로이센 왕이 모여서 이른바 신성동맹을 체결한 역사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중세도시 하이델베르크는 30년 동안 계속된 종교전쟁(1632)으로 성령교회· 마르슈탈(옛날의 왕실 마구간)·기사회관(시민의 집)등만 살아남았을 뿐, 도시의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어서 현재의 건물들은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들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의 고성도 이때 파괴되었다.

하에델베르크 성(Schloss Heidelberg)

하이델베르크에 남겨진 고성은 역사의 굴곡이 만들어지는 격동의 흔적을 되새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의 여행은 아무래도 성을 둘러보는 것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하이델베르크는 원래 팔츠제후국의 수도였다. 팔츠제후는 신성로마황제를 선출하는 7인의 선제후가운데 하나로 황제의 궁정을 관리하는 직위를 맡았다고 한다.

황제의 집사와도 같은 것으로 궁중 법정에서 황제의 대리자 역할을 했으니 그의 당시 지위와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권력에 맞게 하이델베르크 성은 유례없이 화려하게 성장한다.

선제후 루트비히 5세에 의해 1524년 루트비히관이 세워지고, 이어 여러 건물과 도서관이 건립되었다. 이어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르네상스적 건물로 치장을 하기 시작했으며 1555년 놀라운 건축물이었던 유리관이 완성되었다.

선제후 오토 하인리히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오토 하인리히관을 1560년 4년만에 완성하였다. 이 건축물의 전면에는 당시 통치이념을 상징했던 인문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16명의 인물상이 조각되었는데, 아직도 생생함으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그 조각상이다.

성은 계속 확장되었다. 1612~1615년에는 프리드리히 5세(재위 1610-1623년)가 영국 출신 부인 엘리자베트 스튜어트를 위해 바깥에 영국관을 지었다. 성 주변을 둘러볼 때 처음으로 만나는, 오직 창틀만이 남아 있는 건물이 그것이다.

거대한 술통과 종교전쟁 그리고 팔츠상속전쟁

건물과 그 주변의 잔해만으로도 놀라운 성은 그 안에 더욱 놀라운 것이 자리하고 있다. 약 22만 리터의 포도주를 담을 수 있어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술통은 아직도 성의 지하에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실을 가득 채운 그 술통은 높이가 7미터이고, 길이는 8미터이다. 실제로 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작은 동산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하이델베르크 성은 불행하게도 종교 전쟁(1618~1648)과 팔츠 상속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지게 된다. 구교군대들과 신교군대들이 치열한 전투를 통해 하이델베르크는 그 주인이 수시로 바뀌었고, 그로인해 성의 건물들은 하나둘씩 파괴되어 갔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전쟁이 일단락되었지만, 성의 화려함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잠시의 평화에 이어 또 다른 전쟁이 하이델베르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팔츠 상속 전쟁’ (1638~1697, 9년 전쟁), 전쟁이 하이델베르크를 휩쓴 것이다.

1688년 9월 프랑스 군대가 팔츠 선제후국으로 진격해왔다. 전쟁은 성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남겨주었다. 1689년에 도시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1693년에는 도시 전체가 불타버렸다. 고성도 그해 9월에 프랑스 군에 의해 폭파당하면서 궁정은 더 이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는 그야말로 완전 폐허의 상태에 직면했던 것이다.

1697년의 종전과 더불어 시작된 도시 재건이 시작되었다. 기존의 토대 위에 그 당시의 건축 양식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서 중세의 토대 위에 바로크 도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 이 단정하고, 독특한 하이델베르크의 모습은 18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도시는 다시 세워졌지만, 성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일부 재건하고 한동안 선제후궁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팔츠제후는 1720년에 인접한 도시인 만하임으로 수도를 옮겨버린다.

다음 호에서는 하이델베르크 구 시가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1338호 31면, 2023년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