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58)

약탈 문화 예술품 회복과 관련해 일본의 마쓰카타 컬렉션과 이병창 컬렉션의 이야기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재 보호 정책과 관련해 타산지석으로 삼을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문화재에 대해 반환 목소리만 높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소장한 문화재를 대하는 정·관계 및 정책 결정자들의 자세도 바뀌어야 하기에 소개한다.

프랑스 파리, 센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박물관과 마주한 오르세(Orsay) 미술관에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그린 ‘아를의 침실(The Bedroom at Arles)’이 걸려 있다. 고흐가 1889년 9월 프랑스 남부 아를에 머물 때 그린 이 그림을 보는 일본인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

“다른 두 점의 아를의 침실보다 약간 작지만, 더 짜임새가 있군.” “친구 고갱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이 전해진다.” “고흐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됐군.” “엄마와 누이랑 같이 있을 때의 따뜻한 추억이 짙게 뱄구나.” 이렇게 감상하는 이들도 있겠다.

하지만 “일본에서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멀리 파리까지 와서 보는구나”라고 비감하게 느끼는 일본인도 적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일본기업가 마쓰카타 고지로( 方幸次郞, 1866~1950)가 구입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돌려주지 않아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일본에 왔다면 도쿄 국립서양미술관NMWA에 전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에 따르면, 사업가인 마쓰카타는 1910~1920년대 유럽에서 활동한 미술 수집가로, 일본 에도 시대에 유행한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 약 8000점, 서양 미술 약 3000점 등 1만 점 이상을 유럽에서 사들였다. 이런 그의 미술품들을 ‘마쓰카타 컬렉션’이라고 한다.

그가 미술품 수집을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영국 런던에 머물면서부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조선업이 엄청난 이익을 남기면서 거부가 된 고지로는 1916년부터 약 10년간 몇 차례 유럽을 방문해 런던, 파리, 베를린 등의 화랑을 찾아다닌다. 1918년 프랑스 파리의 보석상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2)가 소장한 우키요에 약 8000점을 한꺼번에 수집한다. 같은 해 파리의 뤽상부르(Luxembourg) 미술관의 레옹 베네디트(Leonce Benedite, 1859~1925) 관장의 소개로 ‘지옥의 문(Gates of Hell’)을 비롯한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대표작도 여럿 구입한다.

고흐의 ‘아를의 침실’과 르누아르의 1872년 작품 ‘알제리풍의 파리 여인들(Parisian Women in Algerian Costume)’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유대계 미술상 폴 로젠버그의 갤러리에서 구입한 것이다.

파리 화랑가에서 동양의 컬렉터로 알려진 마쓰카타는 1921년 4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독일 베를린으로 수집 여행을 떠난다.

색채와 빛의 마법사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친구가 된 마쓰카타는 모네 작품 18점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특혜를 누린다. 당시 고갱 15~16점, 세잔 48점, 쿠르베 10점 등을 비롯하여 800점 이상의 명화가 있으니, 이 명화들을 전시해도 훌륭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26년 4월부터 1927년 4월까지 유럽에 머물면서 미술품을 추가로 구입하여 회화와 조각에서 가구와 태피스트리까지 방대한 분량의 컬렉션을 구축한다. 이렇게 대규모로 미술품을 수집한 데는 일본의 신진 작가들에게 서양 미술의 실물을 보여주자는 포부였다고 전한다. 또 모두 함께 즐기는 ‘교라구(共樂) 미술관’ 설립을 구상해 설계안도 만들고 도쿄 아자부에 건물을 세울 부지도 확보했다.

그러나 1927년 경제공황이 상황을 단번에 바꿔버렸다. 주거래 은행인 주고(十五)은행이 휴업하면서 가와사키 조선도 경영 위기에 빠졌다. 마쓰카타는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회사 재무 상태 개선을 위해 개인 재산을 털어 넣었다. 유럽에 남겨둔 컬렉션도 많았지만, 일본으로 가져왔던 미술품은 몇 번에 걸친 전시회에서 팔려나가 흩어지고 말았다.

또 일부 컬렉션은 은행 등에 담보로 잡히거나 경매로 팔리면서 1000 점 이상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우키요에는 일본 왕실에 헌납해 현재 도쿄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의 미술관 설립 꿈도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일본으로 반입되지 못한 많은 작품은 역설적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운명은 피했다. 일본 반입에 차질을 빚은 까닭은1 924년부터 실시된 관세 100퍼센트 정책 때문이었다. 1923년 발생한 간토(關東)대지진의 부흥 자금을 조성하고자 일본 정부가 수입품에 대해 매입가와 같은 금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관세정책을 바꾸었다.

게다가 1920년대 후반, 일본에 군국주의와 국수주의 풍조가 강해지면서 서양 미술은 집권 세력인 군부에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수집품 반입을 서두르지 않고 해외에 그대로 두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영국 런던에 보관된 900여 점은 대전이 일어난 1939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런던에 보관된 마쓰카타 컬렉션 953점의 작품 목록(그림 255점, 판화 554점, 조각 17점 등)이 2016년 9월 런던에서 발견되었다. 그 목록은 마쓰카타와 거래가 있던 런던의 화상이 남긴 것으로, 2010년 영국 국립 테이트 현대(Tate Modern) 미술관에 기증한 문서에 포함되어 있었다(<니혼게이자이신문>, 2018년 6월 30일자 기사).

또 일본에 들어와 흩어진 그의 컬렉션 상당수도 태평양 전쟁 때 폭격을 받으면서 재로 변해버렸다. 반면에 프랑스 파리의 로댕미술관에 보관해달라고 맡겼던 약 400점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오롯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종전 직후,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군국주의 일본을 추축국이자 적국으로 간주해 마쓰카타 컬렉션을 몰수해버렸다.

1338호 30면, 2023년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