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60)

중국이 일본에 약탈당한 수많은 문화재 가운데 유독 ‘홍려정비(鴻臚井碑’) 환수를 표적으로 삼아 우리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홍려정비는 1300여 년 전에 현재 중국의 랴오닝(遼寧)성 뤼순구(旅順口) 황금산(黃金山) 기슭에 자리한 거대한 자연석에 새긴 돌비석이다. 높이1.8미터에 무게 9톤의 규암질 돌비석이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이 관심을 둘만한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이 돌비석이 고대사의 비밀을 품고 있다.

‘최흔석각(崔忻石刻)’이라고도 불리는 이 돌비석은 러일전쟁(1904~1905) 직후 일본이 약탈해 가져가 현재 일본 왕궁에 있다. 중국이 이를 환수하려는 것은 상실한 문화재를 회복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고대사를 자국에 유리하게 재단하려는 의도라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뤼순지역을 배타적,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조차지(租借地)로 확보하면서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끝자락에 세워진 홍려정비는 세워진 지 1200년 만에 일본으로 실려갔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 따르면 1905년 일본 밀정들이 뤼순에 들어와 이 돌비석을 조사한 다음 해에 당나라 시대의 랴오닝성과 관련된 희귀한 돌비석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908년 4월 30일, 제국주의 일본 해군이 러일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일본 군부가 돌비석을 국왕에게 바치면서 일본 도쿄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일본 군부와 국왕은 19세기 후반부터 각국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자 온갖 유물을 ‘영광의 기념품’으로 약탈해 가져갔다 . 그러나 1945년 패전 이후 이런 전리품은 약탈품으로 전락했고, 수장품들 가운데 철조물은 1946년 7월 모두 녹여버렸다. 거대한 자연석 바윗덩어리인 홍려정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국 측은 이 돌비석이 1840년 발생한 아편전쟁 이후 자국에서 약탈된 가장 무겁고 큰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그 후 90년간 홍려정비는 일반인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고대일본사와 발해사를 전공한 일본인 사학자 사카요리 마사시(酒寄雅志)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교수가 1999년 이 비석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졌다.

홍려정비의 위치가 왕궁이라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며, 공개되지 않고 있다. 비공개 상태여서 현재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연구가들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측은 이 비석이 일본의 국유 재산인 만큼 반환은 물론 공개조차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 중국, 홍려정비에 3000억 원 배상 소송도

홍려정비의 존재가 알려진 지 7년이 흐른 2006년 랴오둥반도 남쪽 끝에 있는 항만 도시 다롄(大連)이 이 돌비석 환수를 추진했다. 다롄시 자문기구인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會議)가 2006년 1월부터 비석에 관한 연구를 제안했다. 연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비석 반환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정치협상회의는 중국 지방정부의 의회 역할을 한다. 중국 중앙정부는 이미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권을 포기하였기에 반환을 요구할 수 없어 지방정부가 나선 것이다.

1972년 중국은 일본과 국교정상화 협정을 맺었다. 당시 국교정상화 합의문 제5항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를 포기한다”라고 천명하면서 ‘전쟁배상 청구권’을 포기했다.

배상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는 “배상을 요구하면 일본 인민에게 부담을 지우게 된다. 이는 중국 인민이 몸소 겪어 알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 패배로 2억 5천만 냥을 일본에 배상했다. 청조는 이를 이용해서 세금을 중과(重課)하였다.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로 민중이 고통을 겪었다.

전쟁 책임은 일부의 군국주의 세력에 있으며, 대세인 일반 국민과 구별해야 하므로 이들에게 그리고 차세대에게 청구권의 고통을 부과하고 싶지 않다”라고 청구권 배상 포기 이유를 설명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으로, 중국 정부 기관이 전쟁 시기에 약탈당한 비석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따른다. 물론 중국 측은 홍려정비 약탈은 전쟁 시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당연한 반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롄의 반환 요구에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이번에는 중국 민간단체 ‘중국민간대일배상청구연합회(中國民間對日賠償請求連合會)’가 2014년 홍려정비 반환을 위한 전담팀을 구성하고 일본 왕실과 정부를 상대로 반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는 민간단체가 반환을 요구하는 모양새이지만, 중국의 체제 특성상 중앙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간 차원의 반환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환수한 사례에 따라 중국 정부가 나설 것이라고 밝힌 데서도 중앙정부 차원의 환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홍려정비와 관련하여 이 단체는 또 중국인들이 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로 14억 위안(당시 환율로 3000억 원 상당)의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홍려정비가 있는 일본 왕궁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인 궁내청을 상대로 고등법원 격인 베이징 고급인민법원에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

법원에 제소한 이유는 2014년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을 통해 홍려정비 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측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반환을 요구하는 중국민간대일배상청구연합회가 반환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와 소송 제기 당사자로서의 적격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1340호 30면, 2023년 1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