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➆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유산을 매 주 연재한 바 있다.
2023년에는 2022년 기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신청된 8곳과 신청 후 자진 탈퇴, 또는 유네스코에 의해 등재 거부된 문화유산을 살펴보았다.
2024년에는 구 동독지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실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은 파리의 샹젤리제(Champs-Élysées)거리에 비교할 만한 베를린을 대표하는 대로이다.
베를린 대성당(Berliner Dom)을 연결하는 슐로스 다리(Schloßbrücke)부터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까지 이어지는 폭 60m, 길이 1,5km의 대로인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은 이름은 직역하자면 “보리수나무 아래”라는 뜻이다. Linden 나무가 가로수가 잔뜩 심어져 있어서 거리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런데 보리수로 번역되는 린덴 나무(Lindenbaum)는 인도의 보리수 나무와 한국의 보리수나무로 불리는 품종과는 다른 품종의 나무이다. 원래 한국어가 없던 나무이므로 그대로 린데 나무로 부르는 것이 맞다.
2차세계대전 전까지는 그야말로 베를린의 중심. 지금 대성당 바로 옆 공터 자리에 원래 궁전이 있었고, 운터 덴 린덴은 궁전과 브란덴부르크 문을 연결하는 길이었다. 주변에 관청, 상업건물, 박물관, 극장 등이 빼곡히 들어섰고, 심지어 히틀러는 집권 당시 이 거리에 자신의 관저를 만들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 당시 거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의 모습은 구 동독에서 재건한 것을 바탕으로 한다. 구 동독은 서베를린과의 관문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신들의 중심지를 마음껏 과시하기 위해 이 지역을 아낌없이 개발하였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상업시설과 박물관, 극장, 대사관, 호텔 등이 거리 양편에 줄지어 있다.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Sankt-Hedwigs-Kathedrale)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 또는 성 헤드비지스 주교좌 성당은 독일 베를린의 베벨 광장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베를린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은 종교개혁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 세워진 최초의 가톨릭 성당으로 프리드리히 2세 국왕의 허가에 따라 세워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당시 베를린에 도착한 수많은 가톨릭 이민자들, 특히 상부 실레시아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베를린에 가톨릭 성당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성당은 실레시아와 브란덴부르크의 주보성인 성녀 헤드비지스에게 봉헌되었다. 성당 외관은 게오르크 벤젤슬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에 의해 로마의 판테온에서 착안해 설계되었으며, 경제적인 문제로 몇 년 동안 공사가 여러 번 지연되다가 1747년에 다시 공사가 재개되었다. 1773년 11월 1일이 되어서야 대성당이 개관되었으며, 국왕의 친구이자 바르미아의 교구장(후대의 그니에즈노 대교구장)인 이그나치 크라시츠키 주교가 비로소 공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38년 11월 9일과 11월 10일 사이에 밤 동안에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하였다. 1931년 이래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 참사회의 의전사제인 베른하르트 리히텐베르크 신부는 저녁 기도 시간마다 유다인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기도를 하였다. 결국 리히텐베르크 신부는 나치 독일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1965년 리히텐베르크 신부의 유해는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의 지하실로 옮겨 안치되었다.
성 헤드비지스 대성당은 1943년 베를린 상공에서 대공습을 받아 완전히 전소되었으며, 1952년에 재건 공사가 진행되어 1963년에 끝마쳤다.
훔볼트 대학교( 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
훔볼트 대학교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대학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로이센 왕국의 자유주의적인 교육 개혁가이자 언어학자였던 빌헬름 폰 훔볼트에 의해 1810년 베를린 대학교(Universität zu Berlin)로 창립되었으며 그가 구상한 이 대학의 모습은 다른 유럽과 서방 대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26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이후 대학교가 위치해 있던 거리의 이름을 따서 운터 덴 린덴 대학교(Universität unter den Linden)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1949년 창립자와 그의 형제였던 자연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기념하여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물리학자로 1914년부터 32년까지 이 대학의 교수였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인 아인슈타인은 12~16살에 미적분을 혼자 공부했다. 자유로운 학풍의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고1 때 ‘자기장에서의 에테르의 상태’ 논문을 썼다. 졸업생 또는 교수로 노벨상을 수상한 대표적인 인물은 파울 에를리히 (1908, 의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1, 물리), 막스 보른(1954, 물리) 등이다.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 탐험가 스벤 헤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 등이 졸업했고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 J.G. 피히테,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 테오도어 몸젠, 바르톨트 니부어, 과학자 헤르만 헬름홀츠, 루돌프 피르호,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민속학자 그림형제(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라푼젤,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개구리 왕자, 브레멘 음악대) 등이 이 대학 교수를 지냈다.
훔볼트 대학 본관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하인리히 왕자 궁전이다.
1359호 31면, 2024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