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또 다른 명품, 독일 총리들(9) – 균형 있는 진보 정치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 ➀

명품 왕국 독일에는 제품·인프라·시스템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명품이 많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의 기적’과 정치적으로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어온 ‘서독과 통일독일의 연방총리들’이야 말로 나치 정권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독일이 길러낸 최고 명장들이며 독일 국민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독일의 연방총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서독(아데나워)- 시장경제와 경제기적(에르하르트)- 동방정책(빌리 브란트)-동서 데탕트 시대(슈미트)-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헬무트 콜)- 노동개혁과 독일병 처방(슈뢰더)- 독일병 치유와 EU 대주주(메르켈) 그리고 현재 올라프 숄츠로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건국-분단-냉전-성장-통일-통합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가”

슈미트 총리는 1918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함부르크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의 소꿉친구와 결혼해 70여 년을 해로(偕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되어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종전(終戰) 후 바로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면서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1953년 하원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그 후 사민당 부총재, 빌리 브란트 총리 내각에서 국방장관・재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브란트 총리 시절 귄터 기욤이라는 총리 비서가 동독(東獨)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장기간 서독의 극비 정보가 동독으로 유출되었으며, 동독이 서독에 대하여 정치 공작을 자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브란트 총리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에 따라 슈미트가 1974년 브란트의 뒤를 이어 총리에 올랐으며, 1982년까지 약 8년간 총리로 재직했다.

슈미트는 퇴임 후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의 공동 발행인을 지냈다.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된 후에도 독일 중산층이라는 뿌리를 잃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소박한 연립주택에 살면서 저술과 강연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저서가 10권이 넘으며,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90세가 되어서도 세계 각국으로부터 인터뷰・강연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고,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의 피아노 연주 수준을 자랑하며, 바흐와 모차르트 곡으로 CD 음반을 내기도 했다. 2015년 11월 96세로 작고했다.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가

슈미트 총리는 냉전(冷戰) 시대에 서독(西獨)의 부흥을 일구었다. 재임 중 두 번의 오일 쇼크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경제성장과 복지체계를 정착시켰다. 또한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선진국 클럽인 G7(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캐나다·일본) 회의를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또 1975년 유럽 평화의 상징인 유럽안보협력회의(헬싱키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유럽 통화 통합과 유럽중앙은행을 지지함으로써 현 유럽연합(EU)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대외적으로 보수 성향의 기민당(기독교민주연합・CDU) 출신인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의 친(親)서방 정책,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 정책을 계승·융합하여 발전시켰다. 좌우 이념을 초월하여 외교력을 발휘함으로써 동서 화해와 협력을 이끌어냈다. 서독·구(舊)소련 정상회담, 동·서독 정상회담을 비롯하여 동·서독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슈미트는 냉철했지만 균형감을 유지한 객관적인 인물이었다. 모든 일은 매우 진지하게 처리했다. 독단(獨斷)을 경계했다. 혼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내각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한 토의와 숙의를 거쳐 결론을 내리고 실천했다. 전(前) 정권 정책이라고 하여 무조건 폐기 처분하지 않았다.

그는 보수 야당에 대하여도 타협과 포용의 정치를 펼쳤다. 정적(政敵)들도 그를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가”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는 2011년 11월 사회민주당(사민당) 전당대회에서 당 원로로서 후배 당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정적인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를 도와주라” “주변 국가에 겸허하라”고 설파했다. 이 연설이 끝난 후 6분여 동안 열렬한 기립 박수가 이어졌다. 이 연설은 금세기 최고의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슈미트는 무엇보다 기본 역량이 탁월했다. 지식인을 능가하는 지력(知力) 외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겸비했다. 그는 국방장관 시절이던 1972년, 중국의 잠재력을 알아차리고 빌리 브란트 총리를 설득하여 중국과 수교했다. 미중(美中) 수교보다 7년, 한중(韓中) 수교보다 20년 앞선 일이었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연설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는 차분한 달변에 날카로운 분석력, 시대의 핵심을 꿰뚫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의 단순 명쾌한 언변과 연설은 상대방을 감복시킬 정도로 설득력을 지녔다. 게다가 근면성과 진솔함, 공정성까지, 정치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추었다. 그는 정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부정이나 스캔들에 연루된 적이 없었다.

그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부터 평정심, 즉 심리적 냉철함을 얻었으며,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로부터 ‘도덕과 정치가 함께 가야 함’을 배웠다. 자기 이익보다는 법치(法治) 안에서 도덕적 의무를 충족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독일 철학자 칼 포퍼의 주장대로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와 독재를 거부하고 급격한 변혁을 경계했다.

슈미트는 자신의 롤 모델이 되는 지도자로 토머스 제퍼슨(통찰력・실천력), 존 F. 케네디(카리스마), 교황 요한 23세(관용),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실용) 등을 꼽았다. 이들 모두 독일인이 아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의 지도자관(指導者觀)을 엿볼 수 있다.

다음 호에서는 슈미트의 구체적인 정치활동을 살펴보도록 한다.

1318호 29면, 2023년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