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파독광부 60년 (7)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파독광부의 근무조건과 생활 환경(2)

독일에 한국인 광부가 파견된 것은 1963년 12월부터 1977년까지 약 14년간으로 파독광부 총인원은 7,936명으로 마지막 계약기간 만료되는 기준으로 한다면 1980년까지는 총 17년간이었다.

노동계약은 명목상 3년을 기한으로 하는 광산연수였으나 실제로는 간단한 교육을 받고 독일로 파견된 한국광부들은 광산에 배치 된 후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지하 현장에 배치되어 일반 광부들과 똑같은 작업을 하여야만 하였다.

파독광부들은 일은 열심히 했지만 자신의 계약조건 등을 잘 알지 못하였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자기들이 어떻게 대우를 받는지도 잘 알 수도 없었다.

파독광부 프로그램의 몇 가지 특별한 규정

‘서독 파견 한국광부 임시 고용계획’은 1963년 12월 16일에 발효되었고, 1970년 2월 18일에 제2차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으며, 1977년에는 추가적인 노동계약으로 보완되었다. 서독은 다른 국가들과도 노동자 고용 협약을 체결했지만, 이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다른 외국인 노동자 모집은 1973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광부들은 계속해서 모집될 수 있었다. 그것은 파독광부 프로그램에 몇 가지 특별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독일 정부는 한국 광부의 모집으로 인해 발생할 비용을 거의 떠맡지 않았다. 모집과 관련된 절차상의 비용은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부담했고, 왕복항공료는 노동자 본인이 독일에서 받게 될 연금으로 충당했던 것이다. 독일 회사가 지불했던 것이라고는 고작 3개월간의 언어교육비뿐이었다.

둘째, 한국광부들은 일자리를 변경할 수도 없었고, 노동계약을 해지하거나 연장할 수도 없었다. 예컨대, 터키나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과는 달리 한국 광부의 체류허가는 노동허가에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동계약이 완료되면 체류허가도 자동적으로 소멸되었다.

셋째, 한국인 고용과 관련해서 독일정부가 내건 공식적인 목표는 이들 광부들의 기술수준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목표가 현실화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늦어도 1969년 쯤에는 독일 정부 내에도 이 프로그램이 개발원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견해가 이미 존재하였다.

1970년 제2차 프로그램에서는 기술원조라는 목적이 삭제되었는데, 이로 인해 독일 광산회사 및 한국 정부의 목표가 단기적인 경제적 수익이었음이 확인되었고, 이들이 겉으로 강조했던 ‘개발정책적 측면”은 단지 허울에 불과했음이 확연히 드러났다.

파독광부 중에서 광부출신인 사람은 별로 없었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광부로 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들 한국인들에게 3년간의 막장생활은 신체적으로 커다란 부담이었다. 체력의 중요성과 부상의 위험성으로 인해 이들의 기억 속에는 한국의 군사문화와 결부된 남성상이 자리 잡았다.

이들이 일자리를 전투장으로 표현하고, 동료를 전우로, 노동행위를 생사가 달린 전투행위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한국전쟁과 3년간의 군대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만큼 광부들이 육체적인 압박 속에 쫓기고 있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이들은 막장에서 허용되지 않은 낮잠을 취하거나 치밀한 계산 끝에 병가를 사용하는 등, 착취적인 일상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지 않고 재생산을 위한 공간과 시간을 확보했다. 이처럼 광부들은 착취기제에 나름의 방식으로 은근히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한국 광부들의 파업

이러한 행동이 때때로 적극적인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965년 4월 카스트롭 라욱셀 (Castrop-Rauxel)에 위치한 클뢰크너 베르케 주식회사 (Klockner-Werke AG)에서는 한국 노동자 150명 전원이 3일 동안 불법파업을 감행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한국인 한명이 독일 동료와 몸싸움에 연루되어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맞았다는 데 있었다. 이 최초의 불법파업에서 한국 노동자들은 독일 동료들과 동등한 봉급으로 대우해 줄 것, 신체조건에 맞는 업무를 배당해 줄 것, 그리고 외국인을 적대시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1970년 9월경 서독 아헨(Aachen)에 위치한 에밀마이리쉬(Emil-Mayrisch)광산에서 일하던 한인 광부 73명은 독일 광부들도 꺼려하던 1천m 지하광산 막장에 투입됐다. 하지만 봉급은 독일 사람들보다 적었고, 작업 환경 등이 열악해 건강이 악화됐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작업장에 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하기 싫으면 한국으로 가라!” 이들에게 되돌아온 답변이다. 한인 광부들은 심지어 마이스터(Meister)나 항장으로부터 심한 욕설과 폭행까지 당했다.

당시 14항의 오후반에 나가는 12명의 한인 광부들은 이같은 횡포에 대항해 “부당하게 책정된 임금을 추가 지불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일자리를 재배치하고, 모욕적인 언사와 폭행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이들은 입항하지 않은 채 기숙사로 돌아왔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5년 전의 그것과 동일했다. 무엇보다도 한국 노동자들은 높은 교육수준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독일인 동료들보다 지적으로 우수하다고 느꼈고, 독일인들의 거친 리더십 스타일에 불만이 많았다.

이 소식을 접한 광산소장은 만일 한인 광부 12명이 늦게라도 입항하지 않으면 즉각 해고할 것이며, 당장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통고했다. 이에 반발해 한국인 광부 73명 전체가 집단 행동에 들어갔다.

사태가 확산되자 광산노동자평의회(Betriebsrat)와 한인광부 73명이 참석한 조정회의가 열렸고, 장시간 토론을 통해 한인 광부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행동을 같이한다고 결정했다.

이어 주독한국대사관과 광산, 그리고 한인광부 73명이 참석해 조정회의가 다시 열렸다. 이 때 한국 수석노무관은 한인 광부들의 집단행동(파업)은 불법적이고, 조국의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나무랐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재독한국대사관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래서 광부들은 더욱 단결했다. 결국 한인 광부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돼 해고된 사람이 전원 복직됐다. 그동안 부당하게 체불된 임금도 추가 지불 받았으며, 한국인을 모욕하는 언행과 폭행도 없어졌다.

1980년 초에 다시 불거진 한국인 광부들의 저항은 노동 프로그램의 총체적인 문제점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역시 독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무엇보다 일자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노동계약기간이 만료된 이후 체류기간을 연장할 권리를 요구하였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고려되어 마지막으로 남았던 800여명 광부들의 위와 같은 요구는 수용되었다.(전도된 개발원조 -독일으로의 한국인 노동 이주- 이유재, 최선주 본보 492호 24면)


한국인들이 근무한 지하광산

현재 탄광들은 모두 폐광되었으며, 황량한 벌판에 상징적인 샥흐트(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장치한 철탑)만 남았고, 스키장이나 골프장, 카지노를 유치하는 관광지로 변했다.

(1) 단위 광산별 소개

  • 알렌-베스트팔렌 Ahlen Bergwerk Westfalen(EBV/RAB)
  • 보트롭-프란츠 하니엘(Bottrop Bergwerk Franz Haniel(RAG)
  • 카스트롭-라욱셀 Castrop-Rauxel Bergwerk Victor-Ickern(RAG)
  • 카스트롭-라욱셀 Castrop-Rauxel Bergwerk Erin(EBV)/ Siersdorf Emil Mayrisch (EBV)
  • 딘스라켄 Dinslaken-Lohberg Bergwerk Lohberg(RAG)
  • 도르트문트 Dortmund-Derne Bergwerk Gneisenau(RAG)
  • 두이스부르크-함본 Duisburg-Hamborn Bergwerk Friedrich- Thyssen(RAG)
  • 뒤스부르크-발줌 Duisburg-Walsum Bergwerk Walsum(RAG)
  • 겔센키르헨-샬케 Gelsenkirchen-Schalke
  • 겔센키르헨-비스마르크 Gelsenkirchen Bergwerk Graf-Bismarck
  • 헤르네 1-플루토 Herne Wanne-Eickel Bergwerk Pluto(RAG)
  • 캄프-린트포르트 Kamp-Lintfort Bergwerk Friedrich-Heinrich(RAG)
  • 오버하우젠-스테어크라데 Oberhausen-Sterkrade Bergwerk Sterkrade
  • 오버하우젠-오스터펠드 Oberhausen-Sterkrade Bergwerk Osterfeld (RAG)
  • 레클링하우젠 Bergwerk Recklinghausen(RAG)

(2) 파독한인광부 고용주별 지역별 단위 광산별 분포 현황

◆ 루르탄광주식회사(본사=Hauptverwaltung Stadt Essen)

– West-Deutschsteinkohlen-Ruhrbergbau AG

  1. Ruhr- Bergwerksbetriebe Lohberg / Dinslaken 지역
  2. Ruhr- Bergwerksbetriebe Walsum / Duisburg-Walsum 지역
  3. Ruhr- Bergwerksbetriebe Friedrich Heinrich / Kamp-Lintfort 지역
  4. Ruhr- Bergweksbetriebe Ostfeld / Oberhausen-Sterkrade 지역
  5. Ruhr- Bergwerksbetriebe Constantien / Gelsenkirchen-Wanne-Eickel 지역
  6. Ruhr- Bergwerksbetriebe Ickan / Castrop-Rauxel 지역
  7. Ruhr- Bergwerksbetriebe Ewald / Recklinghausen-Herten 지역

◆ 룩셈부르크 왕궁재단 에쉬봐일러 탄광주식회사 소속: (본사=Kohlscheid)

Eschweiler-Bergwerks-Verein(E.B.V.)AG

  1. E.B.V.-Bergwerksbetriebe Emil-Mayrisch / Aldenhoven-Siersdorf-Alsdorf/ Aachen
  2. E.B.V.-Bergwerksbetriebe Gulay / Würseln bei Aachen
  3. E.B.V.- Bergwerksbetriebe F.-Heinrich / Altendorf-Alten Essen
  4. E.B.V.- Bergwerksbetriebe Bochum Lothringen, Erin, Herbede / Bochum,Herbede, C.-R.
  5. Bergwerksbetriebe Westfalen / Ahlen-Westfalen- International Hoch und Tiefbaubetriebe Heitkamp AG, Wanne-Eickel-Herne

1324호 14면, 2023년 7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