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 150
또 다른 명품, 독일 총리들(15)

초대 통일독일 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 ➃

명품 왕국 독일에는 제품·인프라·시스템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명품이 많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의 기적’과 정치적으로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어온 ‘서독과 통일독일의 연방총리들’이야 말로 나치 정권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독일이 길러낸 최고 명장들이며 독일 국민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독일의 연방총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서독(아데나워)- 시장경제와 경제기적(에르하르트)- 동방정책(빌리 브란트)-동서 데탕트 시대(슈미트)-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헬무트 콜)- 노동개혁과 독일병 처방(슈뢰더)- 독일병 치유와 EU 대주주(메르켈) 그리고 현재 올라프 숄츠로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건국-분단-냉전-성장-통일-통합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년 4월 3일~2017년 6월 16일)은 1982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의 총리와(1982-90년은 서독, 1990-98년은 통일 독일의 총리) 1973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의 총재를 역임한 정치인이다.

콜의 16년 남짓을 달하는 총리 임기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 가장 긴 기간이었고, 전 세계 어디에도 민주적인 투표로 당선된 정부수반들 중 그보다 오래 재임한 사람은 없다. 특히 냉전 시대의 종말을 감독하고 독일 통일을 이끈 업적은 널리 칭송 받고 있다.

통일로 가는 길 1

1988년까지만 해도 헬무트 콜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총리 사퇴를 고민할 정도였다. 건국의 아버지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나 비전의 정치가인 ‘동방정책’의 빌리 브란트 총리에 비해서 특별한 업적도 없었다. 인기는 바닥이었다

이듬해 총선을 대비해 그의 소속 기민당은 젊은 정치인 바덴-뷔르텐베르크 주지사 로타 슈페터를 총리 후보로 물색했다.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도 콜의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빌리 브란트의 ‘정치 조카’로 불리는 사민당의 오스카 라퐁텐은 총리 후보로 의기양양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그러나 콜에게 새로운 역사 무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베를린장벽 너머에서 천지개벽이 시작됐다. 1989년 동독 주민들이 자신의 고향을 엑소더스하는 대규모 탈출이 시작됐다. 고향에 남은 이들도 동독정권 퇴진을 위해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동독의 스탈린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반공 저항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랐고 동베를린 서독 대표부에 역사상 처음으로 121명의 동독 주민이 진입하는 상황이었다. 체코, 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은 연일 모여드는 동독 탈출자들을 위해 마당 가득 텐트를 설치해야 했다.

정치적으로 동물적 감각이 뛰어난 콜 총리는 이를 지나치지 않았다. 콜은 겐셔 외무장관을 파견해 탈출자들을 서독으로 이주시켰고 헝가리 정부로 하여금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는 외교적 성과를 보였다.

헝가리정부의 개방을 저지하기 위해 전면투쟁에 나섰던 동독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호네커 총서기를 축출하고 작센 주의 개혁공산주의자이자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던 한스 모드로프(Hans Modrow)를 동독총리로 임명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약속하며 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9일에는 28년간 동서를 가르던 베를린장벽(Berliner Mauer)이 철거되었고 반세기 억압과 빈곤에 시달려왔던 동독인들이 서독 땅을 밟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조치와 개혁에 대한 약속으로 주민들의 저항을 무마하려했던 동독의 공산정권은 이미 당의 무능과 독선에 식상한 동독주민들의 민심을 돌리지 못했다. 라이프치히(Leipzig) 월요데모로 지펴진 반정부 시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사회적 기능은 마비되어 갔다.

당으로부터 개혁을 위임받고 혼란된 정국을 무마해야 했던 모드로브 총리는 서독의 콜 총리에게 긴급회담을 제의하고 통일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논의할 것을 청했다. 그리고 동독의 사태해결을 위해 150억 DM을 지원해 줄 것을 긴급하게 요청했다.

이에 대해 콜 총리는 그해 11월 28일 의회에서 ‘통일 독일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통일을 이루겠다고 대외에 천명했다. 통일의 목표와 계획이 명시됐고, 이후 서독이 통일 과정의 주도권을 잡게 됐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 발표는 독일 통일의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독은 활발한 동·서독 교류를 추진하면서도 명시적으로 “통일을 이루겠다”고 밝힌 적이 이전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럽에서 독일 통일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돼왔기 때문이었다. 통일 논의가 독일 민족주의를 부추겨 전 세계의 평화를 또다시 깰 수 있다는 염려가 팽배했다.

하지만 콜 총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3주가 지난 1989년 11월 28일 ‘통일 독일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하며 베를린 장벽 붕괴를 통일로 연결시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 프로그램의 골자는 “동독과의 정치적 협상 목표가 독일의 통일이고, 독일 통일은 유럽 통합의 큰 틀 내에서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1∼5항에서는 동독 지원과 동·서독 협력 강화, 동독에 자유·비밀 선거 도입을 담았다. 6∼7항은 범 유럽 발전의 틀 속에서 독일 통일이 이뤄져야 하고, 개혁적인 동유럽 국가들도 다 함께 유럽 통합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8항과 9항은 각각 유럽안보협력체제 강조, 군축과 군비통제였다. 끝으로 10항은 이런 단계를 밟아 유럽 평화가 진일보하고, 독일 민족은 자율적 의사에 따라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독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자 콜이 이런 동독 사태를 처리하는 것은 그의 총리 경력의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