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 60년 (8)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파독광부들의 일상생활

한국인 광산 노동자에게 가장 보편적인 여가활동은 체육이었다.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친목 도모를 위해선 체육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국인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축구는 당시 한인사회를 묶어주는 매개역할을 톡톡히 했다.1972년부터 시작된 󰡐8.15광복체육대회󰡑는 파독 광부의 대표적인 체육대회로 자리매김했고, 나중엔 종합문화축제로 발전했다.

축구대회는 1964년에는 함본 광산에서 시작하여 , 1965년엔 클뢰크너 광산, 1966년엔 에슈바일러 광산을 순회하며 차례로 열렸다. 광산축구팀 선수로 뛰기도 했던 파독광부 이원근씨 등에 따르면, 체육대회에서 단연 인기를 모은 것은 리그전으로 열린 광산대항 축구대회였다.

이 대회를 위해 광산마다 축구팀을 꾸려 자체 훈련이나 지역의 축구팀과 경기를 하며 실력을 쌓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태극기가 꽂혀져 있는 운동장 한켠에서는 한국 음식이 제공됐고, 경기가 끝나면 근처에서 노래자랑도 열리는 등 8, 15광복체육대회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종합문화축제로 발전해 갔다.

기숙사에선 3-5평 남짓한 방에서 2명, 많게는 4명이서 함께 지냈다. 가구는 침대와 함께 책상과 의자, 옷장이 각각 하나씩 배치돼 있었다. 취사장과 목욕탕 및 세면장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공동생활이었기에 다소 불편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4명이 써야 하는 기숙사에서는 대단히 비인간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각자의 작업시간이다를 겨우, 일을 나가는 사람과 쉬는 사람이 엄청나게 불편하다. 아침 6시에 일을 들어가는 경우, 적어도 4시30분에는 일어나 준비를 해야 한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막 3시에 와서 저녁을 먹는 사람과 4시 반이면 일어날 사람을 선잠을 자게 만들고, 낮 12시에 나갈 사람의 잠을 설치게 한다. 이러한 형편없는 기숙사 환경은 특히 한국 광부에게 심각한 상황이다. 다른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은 대개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원병호, 『나는 독일의 파독광부였다』, 한솜미디어: 서울, 2004, 225쪽).

살기 위해선 먹어야 했다. 아침은 간단한 국수와 독일 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국물이 보통. 물론 여유 있는 주말에는 밥과 국을 해서 먹었다. 갱내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기 위해 빵이나 김밥 등을 준비했다. 파독 광부들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싶어도 이에 알맞은 재료가 마땅치 않아 고통을 받았다. 다소 물기가 없는 쌀은 그래도 구할 수 있었지만, 김치를 만들기 위한 채소류와 양념류는 쉽게 구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다음은 백상우씨의 기억이다.

“김치라고 양배추를 대강 썰어서 소금에 절인 다음 고춧가루를 넣어 약간 붉은빛이 나면 최고였고, 이것이 며칠 후에 약간 신맛이 날 때 돼지 삼겹살 찌개를 해먹을 땐 ‘ 둘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좋았다

또는 양배추를 가늘게 썰어서 식초에 담근 것을 물에 빨아 고춧가루를 쳐서 대용으로 먹었다. 김치에 굶주린 우리에겐 별미였다. 사실 그 당시 일반 독일시장에서는 배추, 무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고 독일에서 제일 크다는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는 가끔 배추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백상우, 「한 광부의 여정」, 재독한인글뤽아우프친목회 엮음, 『파독광부 30년사』, 1997, 214-215쪽).

일부 재치 있는 파독 광부는 멀리 함부르크나 네덜란드까지 가서 물고추, 숙주나물 등 한국음식 엇비슷한 재료를 구해 음식을 만들어 먹곤 했다. 특히 한국인 광산 노동자가 계속 늘어나면서, 기숙사 인근의 시장에도 한국 음식 재료도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판매자도 주로 한국인이고, 구매자 또한 주로 한국인이다. 주로 네덜란드 등지에서 일본이나 대만 등지에서 생산 또는 제조된 멸치, 된장, 간장, 고추장, 두부, 잡채 등을 구해 다소 비싸게 팔았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입맛의 보수적 성격 때문에 날개 돋친 듯 팔렸다고 한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서, 김치를 담그기 위해 배추를 키운 사람도 생겨났다. 독일의 기후와 토양 등에 맞지 않아 여러 차례 실패 끝에 재배에 성공, 김치를 해먹기 시작했다. 일부 노동자는 된장과 청국장까지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문화의 차이 등으로 인해 발생한 에피소드도 적지 않았다.

“어제(1965년 4월12일) 윤은 원기를 돋을 양으로 닭을 사다가 마늘과 쌀을 집어넣고 푹 고아먹었다. 그는 평소 선임자의 신임이 두터울 만큼 착실하여 작업장에 도착하자 작업사항에 관하여 물으려고 입을 열기가 무섭게 독일인 3명이 뺑소니를 치더란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는데 얼마 후 반장이 쫒아와 ‘오늘 하루만 휴가를 줄테니 출갱하라‘고 사정했다. 윤은 기가 막혀 왜 그러느냐고 대들자, 반장 또한 코를 틀어막고 물러서며 마늘냄새 때문에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장재림, 「서독의 한국인광부」, 『신동아 1969년 5월호』, 338-339쪽).

강도 높은 노동과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에 한국인들은 위장병 등 소화기 계통의 질병과 감기와 몸살 등 기관지 계통의 질병을 가장 많이 앓았다고, 파독 광부들은 증언했다.

그렇다면 어려운 조건에서 청춘을 불사른 그들은 얼마를 벌었을까?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실적과 성과(실적임금제, 도급제)에 따라 받되, 결혼하고 자녀가 많을수록 많이 받았다. 반대로 근로소득세 등 세금은 결혼하고 자녀수가 많을수록 상대적으로 더 적게 내는 시스템이었다. 일한 만큼 주고, 돈을 번만큼 세금으로 걷는 시장경제의 원칙에, 필요라는 사회성을 가미하는 체제였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임금과 세금징수 시스템에도 적용된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광부로 일한 동포들의 증언에 다르면, 임금은 보통 ‘기본급여‘와 ‘생활보조금‘, ‘광부상여금(프리미엄) 명목의 수당‘ 3가지로 이뤄졌다.

따라서 미혼자는 급료와 생활보조금, 프리미엄이 총소득이 되지만, 기혼자는 여기에 가족수당(배우자수당과 자녀수당)이 추가됐다. 배우자수당이란 별거 명목이었다. 여기에 기혼자는 본인의 위험수당에 배우자, 가족의 위험수당까지도 더 받게 돼 미혼자와의 임금격차는 더욱 커진다.

이와는 반대로, 자녀를 가진 기혼자는 총임금에서 무려 19%를 원천 징수하는 근로소득세를 상대적으로 적게 냈고, 미혼 노동자는 가장 많이 냈다. 다만 소액인 사회보험료만 기혼자가 미혼자보다 조금 더 낼뿐이다.

독일의 광산 노동은 보통 오전, 오후, 야간반에 따라 구분됐다. 오전반 노동자들은 오전 6시~오후 2시, 오후반은 오후 2시~오후 8시, 야간반은 오후 8시~오전 6시에 일했다. 한국인들도 똑같이 적용됐다.

파독 광부들에 따르면,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은 근로소득세, 사회보험료, 여기에 귀국여비 적립금 등을 빼고 적게는 월 300마르크, 많게는 월 1100마르크까지 받았다. 보통 600마르크 안팎에서, 미혼자보다 기혼자가 더 받았다는 얘기다.

이상에서 살펴본 파독광부의 특징은 다른 외국인노동자들과 비교해 한국 광부들의 교육수준이 높았다는 점이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이다. 광부로 일했던 한국인의 60% 이상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다녔고, 도시의 중산층 출신이었다.

파독광부 프로그램은 해외여행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시절에 외국으로 갈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좋은 기회였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미국으로 가거나 혹은 독일에 남아 공부하려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3년 동안에 많은 돈을 벌어서 한국에서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실제로 파독 광부의 절반 정도가 계약만료 후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도 독일에 남아 있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독일관청은 이를 엄격히 거부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체류연장이 가능했던 한국 간호사와 결혼하여 거주권을 획득하였다. 이들 독일에 잔류한 광부들은 대부분 광산을 떠났고, 공장에서 일하거나 자영업으로 전환했다.

1328호 14-15면, 2023년 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