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 183

독일의 군사 제도 ➀

독일 연방군의 뿌리는 프로이센군이다. 프로이센은 1806년 나폴레옹에게 패한 후 샤른호르스트 장군(Gerhard von Scharnhorst)을 중심으로 철저히 군을 개혁했다. 군사복무를 가장 숭고한 임무로 규정짓고 군대 내 체벌을 없앴다.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 집단에서 서로 감싸고 격려는 못할망정 구타가 횡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라는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샤른호르스트 장군은 구타 금지 이외에 징집제와 장군참모 제도를 도입했고 귀족 출신들로만 구성되었던 장교단의 문호를 일반 시민출신에게도 열었다. 출신 계급보다 성과를 중시하는 제도가 도입되는 등 근대적 개념의 군대로 탈바꿈한 프로이센군은 1871년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비스마르크가 독일제국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독일제국을 거친 후 바이마르공화국 군대 제국군(Reichswehr, 1919~1935)과 히틀러의 제3제국의 나치군(Wehrmacht, 1935~1945)은 양차 대전의 주역이 되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이후 나치 독일군은 1946년 8월 공식 해체되었다. 독일은 미·소·영·프 전승 4개국에 의해 탈군사화가 되었고, 군비계획 자체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서독의 초대 수상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는 게르하르트 슈베린과 그의 후임 테오도르 블랑크를 안보특보로 삼아 비밀리에 재무장과 군대 창설을 계획했다. 아데나워는 당시 전승 4개국으로부터 제약받던 주권을 회복하는 최우선 수단이 바로 군대창설이라고 인식했다.

아데나워는 특히 한국전쟁으로 서방세계에 대한 소련의 위협이 고조되는 틈을 타 서독이 서방의 안보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도 브뤼셀협약에 따라 결성된 유럽 방위공동체(EVC) 회원국들에게 서독의 나토가입을 허용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서독은 1954년 10월 23일 서유럽연합(WEU)에, 1955년 5월 5일 나토에 각각 가입했다. 1955년 11월 12일 샤른호르스트 장군탄생 200주년 기념일을 기해 서독 연방군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고, 1956년 4월 1일 독일 군법의 효력이 발효됨에 따라 ‘연방군(Bundeswehr)’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여기서 장교와 부사관은 거의 예외 없이 나치군에 몸담은 경력이 있었다. 1957년 4월 1일, 의무 복무병 1만 명이 최초로 육군에 소집되었다.

연방군의 제도와 특징

연방군은 과거 나치의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군사력의 정치도구화’가 유럽 전체에 재앙을 불러왔기 때문에 장차 독일군은 또다시 ‘국가 속의 국가(Staat im Staate)’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민주주의 헌정 질서 안에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련된 것이 바로 ‘군에 대한 문민통제와 의회통제’라는 제도적 장치다.

평시에는 민간인인 국방장관이, 전시에는 수상이 군에 대한 지휘·명령권(Befehls-und Kommandorecht)을 행사하고 이에 대해 연방의회에 책임을 진다. ‘군에 대한 정치의 우위권(Primat der Politik)’을 규정한 기본법(헌법)에 따라 정부에 대해 군사 관련 최고

조언자이며 전체 군인을 대표하는 합참의장도 국방장관과 차관 예하에 놓여 있다.

연방군은 또한 ‘의회의 통제를 받는 군대’라 불린다. 연방의회가 연방군의 임무, 구조, 조달, 예산 등을 결정하며, 연방군의 해외파병은 연방 하원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의회가 연방군을 통제하는 또 다른 수단 중 하나가 바로 ‘군 특명관(Wehrbeauftragte)’ 제도다.

1957년 연방하원에 설치된 군 특명관은 일종의 ‘옴부즈맨’으로, 연방군이 민주군대로 계속 발전하는지, 부대지휘 시 ‘내적지휘(Innere Führung)’의 기본원칙이 준수되는지, 군인의 기본권이 보장되는지 등을 감독한다.

연방군은 양차 대전과 같은 부정적인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고 독일기본법 제1조 제1항의 인간의 존엄성 수호를 실현하기 위해 1953년 연방군 창설 당시 지휘통솔 개념으로 ‘내적지휘’를 도입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연방군은 국가와 사회를 지키는 데 필요한 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Legitimation), 민주사회에 통합되어 의회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Integration), 군인들에게도 민주・법치국가의 자유가 보장되고,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Identität). 군인도 이른바 ‘군복을 입은 시민(Staatsbürger in Uniform)’이라는 것이다.

연방군은 처음부터 중부 유럽에 대한 공동방위와 전쟁 억제를 위한 나토 집단방위체제의 일부로 창설되었다. 동서 냉전시기에는 나토의 ‘전방방위(Vorneverteidigung) 전략’에 따라 독일 영토 안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침공에 대한 방어와 억제 임무를 수행하며 동맹국을 방호했다.

연방군은 통일을 맞아 군사통합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1990년 8월 동독 인민의회는 서독기본법 제23조에 따른 통일 방식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동독 정부는 군사 분야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재량권을 상실한 채 동독 인민군을 포함한 동독의 모든 국가체제와 기관을 통일 전에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동독 군 지도부는 동독 인민군의 이해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통일 전 모두 제거되었고, 동독 인민군도 일방적으로 무장 해제되었다. 통일 후 동독 인민군 중 2만여 명(전체의 약 10%)만이 서독 연방군에 편입되었고, 무기나 장비는 대부분(80% 이상) 폐기되었다. 나머지는 인접국에 증여되거나 전차는 터키에, MIG-29 전투기는 폴란드에 각각 매각되었다.

통일 후 양군의 군사통합 과정은 어떠한 무력 충돌도 없이 서독연방군의 일방적 계획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90년대 초반 이미 군사통합은 외형적으로 완성되었고, 연방군에 흡수된 구동독 인민군 출신들은 비교적 빨리 연방군에 적응했다.

1358호 29면, 2024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