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한국문화재를 만나다(15)

김(Beckers)영자박사와 윤재원 교수, 안봉근선생 자료를 찾다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이 1920년대 독일로 망명 후 드레스덴 민족학박물관(이하 박물관)에서 근무하고 베를린에선 영화배우로도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희귀 자료가 발견됐다.

안중근과 여덟살 터울인 안봉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안중근의 ‘영적 아버지’ 니콜라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 가톨릭 사제를 시중드는 사람)였다.

안봉근 선생의 독일생활은 김영자 박사가 2020년 “재독한인 독일이민 100년사”를 추적하던 과정에서 처음 발굴하게 되었는데,, 이후 김영자 박사는 안봉근 선생에 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는 김영자 전 레겐스부르크 대학 교수,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와 함께 밝혀낸 연구 결과를 최근 공개되었다.

지난 3월 16일(토) 한국 교회사연구소 제214회 연구발표회에서 윤재원 교수가 「안봉근의 독일에서의 활동—드레스덴 민속학 박물관에서의 활약상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안봉근 선생의 일제 강점기시대 독일 내 활동을 소개하였다.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황해도 해주 태생인 안봉근은 지역에 성당을 개소한 프랑스 선교사 빌렘 신부를 10여년간 곁에서 보좌했다.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뤼순 형무소를 방문해 안중근을 면회하고 사형 직전 고해성사와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이후 안봉근은 빌렘 신부를 따라 1914년 4월 유럽으로 갔다가 2년 만에 귀국길에 올랐는데, 일제 정보기관의 ‘용의조선인명부’에 따르면 해외 반일단체에 투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언론 보도와 재독소설가 이미륵(1899~1950, 『압록강은 흐른다』 저자)의 회고를 종합할 때 안봉근은 1920년 초 상하이에서 일가친척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다가 그해 5월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사촌동생 안봉근(1887~1945?) 선생이 두루마기 차림에 탕건을 쓰고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 독일 드레스덴 박물관이 1920년대 촬영한 것으로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가 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공개했다.

이번에 윤재원 교수가 발펴회에서 소개한 사진과 유물은 안봉근이 1920~30년 박물관에서 한국 농기구 모형을 제작하고 담당 학예사를 교육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새끼를 꼬아 짚신을 삼는 모습이나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사진에서 안중근을 연상시키는 다부진 이목구비가 돋보인다.

윤재원 교수는 “안봉근이 박물관에서 일했다는 학계 연구를 토대로 조사하니, 100년 전 아카이브에서 그의 사진 3장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안봉근이 직접 제작한 겨리쟁기 등 농기구 모형 14점도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독일어 유물카드에는 안봉근이 한국어 명칭을 병기한 친필이 남아 있다.

안봉근은 당시 제주도 민속 문화재(이른바 ‘스퇴츠너 컬렉션’)를 다수 입수한 박물관에서 한국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당대 최고의 인류학자 마르틴 하이드리히의 논문 ‘한국의 농업’(1931) 완성에 크게 기여했다.

일어·독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했던 안봉근은 현지에서 한국 문화 관련한 강연과 저술을 하면서 ‘중국인 미망인’(1931)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안봉근선생, 독일 영화에도 출연

안봉근선생이 1930년대 독일 베를린 거주 당시 출연했던 영화 ‘남자들은 그래야 한다’(1939)의 스틸 컷. 안봉근은 대사 몇 마디의 인도계 사육사 역할을 소화했다. 루르 보훔대학의 윤재원 교수(한국학)가 영화 필름을 입수해 안봉근 출연 장면을 캡처했다.

윤 교수는 1930년 안봉근이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출연한 영화 두편의 필름도 입수·조사했다. ‘대제의 밀사’(1936)에선 엑스트라, ‘남자들은 그래야 한다’(1939)에선 인도계 사육사 단역으로 확인됐다. 이들 필름 스틸 컷도 국내 처음 공개됐다. 윤 교수는 “한국인이 독일 사회에서 인정받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안봉근은 적극적으로 예술과 창작 활동에 나섰고 현지 오피니언층과 교류를 이어갔다”고 평했다.

당시 안봉근은 두부 공장을 차려 운영했는데, 이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설도 있다. 다른 초기 이민자에 비해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안봉근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남승룡 선수가 마라톤 금·동메달을 각각 땄을 때 동포들을 모아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1945년 광복 후 귀국을 희망했지만 그해 이탈리아에서 병으로 급작스레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연구는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지원으로 유럽 내 한인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 지역에 이주하기) 100년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윤 교수는 “안중근의 의거 후 가족이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의 유지를 받드는 활동이 이어졌다”면서 “사촌동생 안봉근도 독일 내 한인 정착사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며 한국 알리기에 앞섰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윤 교수 등 3인은 조만간 이 같은 성과를 학술논문으로 발표하고 안봉근의 독립운동 지원설 등을 추가로 뒤쫓을 계획이다.

1359호 30면, 2024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