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

독일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3)

문화사업단에서는 독일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을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유럽 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오페라의 산실을 안내하고, 이를 통해 독자들이 독일의 긴 겨울동안 유럽 음악감상의 공간을 안내하고자 한다.

도이체 슈타츠오퍼(Deutsche Staatsoper)

베를린은 전 세계 실험 예술의 경향을 결정짓는 도시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이 생성되고 발전하는 곳이다. 20세기 초 베를린은 전 세계 새로운 예술의 메카였다. 유럽 각지의 예술가들이 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히틀러 나치정권의 출현은 베를린을 반문화적 도시의 상징으로 전락시켰다. 많은 유태계 예술가들이 가스실로 끌려갔거나 문화적 터전을 떠나야 했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불태워졌고, 예술품들이 훼손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베를린은 더 이상 유럽문화의 중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아주 빠른 발전을 하면서 이 도시는 다시 유럽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베를린 필하모니(Philharmonie)와 서베를린에 있는 도이췌오퍼 베를린(Deutsche Oper Berlin)과 동베를린지역에 슈타츠오퍼 운터 덴 린덴(Staatsoper Unter den Linden)과 코미쉐 오퍼 베를린(Komische Oper Berlin)이다. 3개의 오페라 하우스가 각기 다양한 레퍼토리로 전 세계 클래식 음악팬들을 유혹하는 도시가 바로 베를린이다.

슈타츠오퍼의 역사

베를린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인 도이체 슈타츠오퍼(Deutsche Staatsoper)는 프로이센의 영광을 구현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에 의해 1742년 12월 7일 개관한 왕립 오페라 하우스(Königliches Opernhaus)가 그 전신이다.

왕립오페라 하우스가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되기까지에는 몇 차례 역경이 있었다. 오페라가 시민들에게 확산되면서 좌석을 더 늘리기 위해 1788년에 개축했고, 1843년에는 화재로 인해 손실되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제1차 대전 때는 다행히 전화를 입지 않았으며, 프로이센 국립 오페라 하우스(Preusische Staatsoper)라고 개칭하고, 막스 폰 실링을 음악감독으로 영입하여 현대 작품들을 차례로 공연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음악감독으로도 임명되기도 했었다. 그는 음악감독 자리를 도이체 슈타츠오퍼(Deutsche Staatsoper)로 새롭게 태어난 1919년 11월까지 계속 유지 하였다. 황실 오페라와 독일 귀족들은 일차대전 후 그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이 황실 오페라(Hofoper)는 슈타츠오퍼(Staatsoper), 즉, 국립 오페라 하우스로 개칭되었다.

이 무렵인 1925년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 (Wozzeck)’가 초연 되었다. 더 큰 무대를 위해 1910년에는 주무대를,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는 옆 무대를 개조했으며, 확장 개보수 후 바이로이트 지휘자로 활약한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를 영입하였다.

정치적 선전도구로 전락한 슈타츠오퍼

나치 집권 시기 슈타츠오퍼는 시련을 겪게 된다. 나치의 유태인 억압정책은 많은 베를린의 우수한 지휘자, 작곡가, 음악가들을 추방하게 만들었다. 오토 클렘페러 또한 나치에 의해 1933년 추방되었다.

슈타츠오퍼는 “우수한 아리안 예술가”들만이 지휘하고 노래하는 전통적인 오페라 작품만을 공연하는 것을 지속하였다. 즉, ‘국가 음악’ 또는 “민족의 대표 음악”이란 이름으로 바그너의 작품이 많이 공연되었고, 클렘페러가 추방된 후에는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가 뒤를 이어 지휘를 했다.

독일군의 무자비한 런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된 1941년 4월 9일 연합군의 베를린 폭격으로 슈타츠오퍼는 파괴되었으나, 이 오페라 하우스는 제 3제국에게는 정치적 선전(Propaganda)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장소였기에 즉시 재건축되었다.

전후 복구 최우선 과제, 슈타츠오퍼의 재건

슈타츠오퍼는 1945년 2월 3일 다시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고, 이번에는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쟁 후, 패전국가 독일은 재정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연합군의 통제를 받게 된다.

이때 연합군이 독일정부에 사회기반시설 구축의 최우선 과제를 요구하라고 했을 때, 놀랍게도 독일 정부와 국민들은 전후 복구 지원의 최우선 과제로 파괴된 이 오페라 하우스의 재건을 선택했다. 오페라와 독일문화에 대한 독일인들의 놀라운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재건 당시 외관과 기본적 구상은 크노벨스토르프(Knobelsdorff)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표현하여 1952년 착공하여 1955년 9월 준공했다. 내부는 완전히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120명을 수용하는 오케스트라 박스는 수압으로 상하가 움직이도록 했고, 잔향은 2초 가 조금 못되도록 하여 오페라 하우스로서는 이상적인 구조였다. 수용 인원도 종래의 5층에서 한층 줄인 4층으로 하여, 객석은 1,396석이 되었다.

하지만, 베를린의 장벽 설치와 함께 많은 음악가들이 서독의 도이치 오퍼 베를린으로 떠나버렸고, 동독정부의 무관심으로 시설이 낙후하기도 하였으나, 테오 아담, 페터 슈라이어등 동독이 자랑하는 위대한 음악가들이 이곳 슈타츠오퍼를 지키면서 명성을 이어나갔다.

통일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명망 있는 지휘자중의 하나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을 음악 총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슈타츠오퍼 250주년이던 1992년 바렌보임은 도이체 슈타츠오퍼의 지휘를 수락한 이후, 한때 다른 베를린의 오페라 하우스들 사이에 뒤떨어져 있던 이곳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오페라 하우스중의 하나로 변모시켰다.

1319호 23면, 2023년 6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