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또 다른 명품, 독일 총리들(10)

균형 있는 진보 정치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 ➁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을 겸비한 소신주의자”

명품 왕국 독일에는 제품·인프라·시스템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명품이 많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의 기적’과 정치적으로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어온 ‘서독과 통일독일의 연방총리들’이야 말로 나치 정권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독일이 길러낸 최고 명장들이며 독일 국민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독일의 연방총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서독(아데나워)- 시장경제와 경제기적(에르하르트)- 동방정책(빌리 브란트)-동서 데탕트 시대(슈미트)-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헬무트 콜)- 노동개혁과 독일병 처방(슈뢰더)- 독일병 치유와 EU 대주주(메르켈) 그리고 현재 올라프 숄츠로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건국-분단-냉전-성장-통일-통합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슈미트 총리는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을 겸비한 소신주의자였다. 국가 위기 관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리더십은 위기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그의 특유의 돌파력과 추진력은 전광석화처럼 신속하고 대담했다. 그는 국내 테러 위협과 구소련 핵(核)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2년 엘베강 대홍수로 함부르크가 물에 잠겼다. 이때 함부르크 주(州)정부 내무장관이던 슈미트는 그에게 없던 권한까지 동원해 경찰과 군(軍) 병력을 신속히 투입해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해냈다. 초기에 월권이라는 비난이 거셌으나 그에게는 인명 구출이 더 급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주민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으며 일약 전국적 스타가 되었다.

특공대 보내 항공기 납치한 적군파 사살

1977년 10월, 독일 극좌 강경 학생운동 세력들이 조직한 ‘적군파(赤軍派·RAF)’ 테러리스트들이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납치했다. 이들은 9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인질로 잡고, 복역 중인 테러범 석방 등 무리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국내에서는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는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슈미트 총리는 이 항공기를 아프리카 소말리아 수도인 모가디슈 공항에 비상 착륙하도록 유인하면서, GSG-9라는 특공대를 급파하여 테러범들을 모두 사살하고 인질들을 전원 무사히 구출하였다.

사실상 이 인질 구출 작전은 슈미트 총리로서는 정치생명을 건 일대 모험이었다. 이전에도 적군파는 검찰총장·연방판사·정당 간부·경총(經總) 회장 등 요인을 납치·암살하고, 주(駐)스웨덴 독일대사관을 습격하는 등 수차례 극악한 테러를 자행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슈미트 총리 집 근처에도 출몰하여 살해 위협을 가했다.

결국 이 인질 구출 작전이 성공하면서 적군파 핵심 지도자들은 집단 자살하고 조직은 와해되었으며, 적군파 테러의 불안과 혼란은 막을 내렸다.

()에는 핵으로

슈미트는 소련의 SS-20 미사일 배치에 맞서 미국의 퍼싱-2 미사일을 배치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는 동서 냉전으로 세계 안보 불안이 심각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그는 동서 데탕트를 통해 서독의 안보 위기 해소와 유럽 전역의 평화 질서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자국(自國)의 안보에 관한 한 절대 양보를 하지 않았다.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75~76년 소련은 동독과 동유럽에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배치하였다. 이 핵미사일은 사거리가 5000km로 서독을 포함한 전 서유럽을 사정권에 둔, 핵탄두를 3개 탑재할 수 있는 공포의 무기였다. 당시 소련과 미국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통해 서로를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전략무기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협정 내용에 서유럽은 빠져 있어 사실상 서유럽 전체가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이 무기가 언제 서독 상공에 떨어질지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슈미트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동분서주 고군분투하였다. 소련에는 지속적으로 핵 감축을 요구하는 동시에, 서방측에는 재무장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서방의 방위기구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이중결정(Doppelbeschluss)’ 카드를 제의하였다.

이중결정이란, ‘동유럽에 배치된 소련 핵무기가 폐기될 때까지는 서유럽에도 동일한 수준과 규모의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의미다.

나토는 슈미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4년 내에 상호금지에 이르지 못하면 서유럽에 미국의 퍼싱-2 핵미사일을 전면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슈미트는 이를 서독 영토에 허용하는 결단력을 보였다. 퍼싱-2는 7분 만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가공할 무기였다.

퍼싱-2 배치로 소련의 양보 이끌어내

퍼싱-2 배치 계획은 서독 내 평화주의자와 환경주의자들의 극렬한 반대를 불러왔다. 반전(反戰)·반핵(反核) 단체들과 대학생들은 연일 데모 시위를 열었다. 심지어는 슈미트의 소속 정당인 사민당 내에서도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슈미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토의 ‘이중결정’ 없이는 소련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낼 수 없다”면서 당원과 당내 인사들을 설득하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서방 측의 재무장을 위해 의회 불신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퍼싱-2 배치를 둘러싼 국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슈미트는 서독 국민들의 강한 안보 의식, 자신에 대한 높은 신뢰도 등을 바탕으로 1980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퍼싱-2의 서독 배치에 대한 당위성과 정치적인 추진동력을 갖게 되었다. 1982년 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인 1983년 연방의회의 의결을 거쳐 서독에 퍼싱-2가 실전 배치되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안보 정책은 일관성 있게 추진된 것이다.

1319호 29면, 2023년 6월 16일